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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이 부인의 지조와 정렬각 2017-01-31
수은 강항(姜沆)선생에 대해 本紙가 앞장서서 다루고 있는 이유가 있다. 일부 指導層에서는 수은 강항(姜沆)선생이 극일의 대표주자이기에 한*일간의 교류에 있어서 더 어렵다고 아주 쉽게 말하며 고개를 흔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결코 그렇지 않다. 일본인 강경파의 문화의 부족이고 수은 강항선생에 대한 우리 국민의 교육의 부족이다.일본의 강항(姜沆)선생(친한파)지지자 무라까미는 그의 飜譯서인 ‘포로로 끌려간 강항(姜沆)’에서 일본 朱子學의 비조인 수은 강항(姜沆)선생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가장 극과 극의 論法은 이렇다.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다음해에 포로로 끌려가며 가오리나 홍어를 잡는 갈쿠리에 왼쪽 뺨이 찢기며 두 살배기 아들 용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 애생이를 바다의 孤魂으로 보내고 형과 가족과 조카 그리고 장인을 비롯해 처족까지 학살을 당해 가면서 연일 포로로 끌려가는 1598년 31세에 젊은 혈기의 유학자 강항(姜沆)에게 일본은 미친 짐승 같은 존재로 보이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이러한 강항(姜沆)선생의 극일에 대한 극도한 반항심은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그 만큼 안할 수 없을 것이라고 무라까미도 강항(姜沆)선생을 두둔한다.반면에 종을 부리고 있으며 정실을 놔 두고 妾室을 뒀다는 것에 대한 封建的인 생각을 깊숙이 갖고 들어와 조선시대상을 파 헤치면서 같은 무리의 양반네로 조금은 빈정대는 부분도 존재한다.어디 그뿐이랴!!가이더 두 명의 안내를 받으며 극한파 가이더와 친일적인 가이더에 대한 비평도 빠뜨리지 않고 무라까미는 기억하고 있다.
역사의 굴곡 넘어 피맺힌 절규가 보이는 듯 역사는 왜곡되고 또 왜곡되어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 도도히 내려오는 기록에 의한 역사는 결코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강항(姜沆)선생에 의한 기록은 그의 저서인 '간양록'에 의해서 그 당시 실상이 적나라하게 분석되고 현장감있게 전한다.다만, 선생의 부인에 대한 기록은 희미해져 있는 게 사실이다. 선생은 일생동안 부인에 대한 표현은 순천 앞바다에서 왜놈들에 의해 모진 고생을 다하다가 매 맞아 죽자 ‘相思恨’라는 시 한 수를 읊으며 애간장 끓이고 단장을 애이는 울분을 토로했을 뿐 부인뿐 아니라 여성에 대한 얘기조차도 전혀 없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다.
2013년 발행한 영광군지 이조이부인지금까지 정실(진주김씨부인)과 첩실(애생이 엄마)로 2명이 계셨다고 역사는 전해오나 2013년 발행한 靈光군지에는 이조이라는 妾室이 나온다.선생께서 52세(1619년)로 타계하시고 이조이는 두살배기 사내아이(네 살 형도 있었다고 전해내려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상복에 달린 배띠로 목을 매달고 자진하였던 것이다.이를 안 인조가 정문(정렬각)을 세우고 표창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렇다면 정실인 김씨 부인과 이미 1598년 순천앞바다에서 왜놈에 의해 맞아죽은 애생이 엄마(함평이씨)와 이조이 부인과는 시대와 일본에서 돌아와 말년에 수발을 들다가 강항(姜沆)선생이 운명하자 목을 매 자진했다는 이조이부인은 결코 애생이 엄마와 똑같은 이씨부인이라 할 수 없다.추정해 보건데 이 무렵의 이조이부인은 20~30세의 꽃다운 나이였으리라!!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산서원의 정렬각(비)에는 애생이 엄마 이씨부인의 행적과 이조아라는 부인의 이야기가 뒤섞어 기록되어 있다.거듭 강조하건데 현존하는 기록에 의한 역사왜곡은 기필코 바로 잡아야한다.그건 족보를 앞 세워 우선할 수도 없다. 가문의 족보가 발행한 연도와 인조가 정문(정렬각)을 내린 연도를 정확히 살펴보고 지금 또는 후대가 판단하여 언제든지 바로잡아야한다.결코 ‘생생한 역사는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죽곡 이장영선생 따님의 설(애생이 엄마와 이조이부인비교)죽곡 이장영선생은 1521년에 출생하셨다. 강항선생이 태어난 해에 이미 47세이며 함양군수를 하고 있었다.죽곡 이장명선생의 기록은 1593년까지 기록되어 있으나 이미 66세의 중노인의 나이였기에 이 무렵 타계하시지 않았을까 싶다.그렇다면 1593년 죽곡이 살아있다고 가정할 때 강항선생은 당시 말도 안 되게 늦은 27세의 나이에 진주김씨부인과 결혼을 했다는 가정법이 성립된다.(역사적인 사실로 입각해 말하자면 선생은 22세에 진사가 되어 동년배인 진주김씨 부인과 결혼을 하는데 본처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이유야 어쩌려만은 이후 애생이 엄마(강항선생께서 27임을 가정해 보면 추정나이 21 ~ 27세)는 1594년~1596년에 첩실로 들어와 애생이와 아들 용을 낳았으리라. 위와 같이 진주 김씨부인으로 부터 자식이 없었다는 걸 반추해 볼 때 강항선생께서는 47~50세(1614~1616년)에 이조이 부인으로 부터 사내아이 2명(식만, 식해)을 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족보에는 이조이부인에 대한 설명이 없다. 엄연히 이조이부인의 소생으로 도도히 수은공종회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데도 애생이 엄마라는 함평이씨 부인은 역사속에 존재하는데도 이조이부인은 역사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역사적 사실이 이러할진데 더 나아가 이조이 부인이 죽곡의 따님이라는 설은 현실적으로 너무 거리가 멀고 지금의 수은공 종손과 수은공 후손이 있게한 이조이 부인을 다시 재조명해야 한다고 역사앞에서 재차 강조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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