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훅송리 용두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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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창녕군 성산면 냉천리 성준기가 소장하는 조선시대 문신
성안의의 영정.
지정번호 : 경남문화재자료 제247호
지정연도 : 1997년 12월 31일
소장 : 성준기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성산면 냉천리 222
시대 : 조선시대
크기 : 길이 160㎝
분류 : 회화류


설 명

부용당 성안의는 본관 창녕(昌寧). 자 정보(精甫). 호 부용당(芙蓉堂).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
1591년(선조 2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녕에서 의병 5000명을 모집, 각지에서 왜적과 싸웠다. 1597년 지평(持平) 등을 거쳐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지내고, 1612년(광해군 4) 광주목사(光州牧使) 때 소송(訴訟) 처리를 소홀히 다루어 파직당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복직되어 사성(司成) 등을 지내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公州)로 호종, 이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628년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으로 취임하지 못했다. 이조판서 ·대제학이 추증, 창녕 연암서원(燕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부용당일고(芙蓉堂逸稿)》가 있다.
영정은 1602년 성안의가 영해부사로 있을 때 제작된 초상화 1점으로 길이 160㎝에 이르는 명주 바탕에 채색한 그림이다. 무색 도포를 입고 있는 전신 입상으로 상투튼 머리에 몸을 약간 옆으로 틀고 두 손을 모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춘향전의 비밀≫에서 고정관념을 깨고, 춘향전의 원작가를 실명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그리고 완판 84장본이 그토록 인기를 얻는 춘향전 텍스트가 된 비밀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춘향전>의 작가로 조경남이란 사실은 연세대의 설성경 교수님이 밝혀낸 것이다. 바로 판소리계 소설로 알려졌던 <춘향전>을 모두 뒤집는 혁신적인 주장이다.


그가 산서 조경남을 <춘향전> 원작가로 제시했던 근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산서 조경남은 남원에서 70평생을 살았기에, <춘향전> 핵심공간인 남원과 광한루에 얽힌 사건과 상징적 의미에 정통하였다.




②산서는 임병양란 때의 국내외 역사를 57년간 잡록체 일기로 남길 정도로 엄청난 정보력을 가지고 있었다.




③산서는 이도령 모델인 계서 성이성의 스승이며, 암행어사가 된 그를 광한루에서 만나 함께 보냈고, 이부사 모델인 부용당 성안 부사와도 교류하였다.




④산서는 남원 기생 춘향의 비극적 사건과 그 사건으로 인하여 생긴 신원 설화의 내력을 알고 있었다.




⑤산서는 <춘향전>의 꽃인 <금준미주시(金樽美酒詩)>를 자신의 일기인 <속잡록> 속에 소개하였고, 그 내용은 <연려실기술>에 인용되었다.




⑥<춘향전>의 구성이나 주제를 볼 때, <금준미주시>는 원작가의 창의력과 강력한 비판의식이 아니고는 표현하기 어렵다. 또 이 시는 <춘향전>의 역사적 전개에서 변하지 않은 대표적인 구절이다.




⑦산서는 성리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상당한 문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학제에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고, 진사에 급제했다. 그는 다수의 한시문을 창작하였다.




⑧산서는 순국한 의병장 조헌의 수제자이며, 그 자신도 임병양란 때 적과 맞서 싸우며 왜병을 직접 격퇴한 무패의 의병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작품 내적 요소와 외적 요소를 함께 고려한 결과이다. 먼저 작품 내적 요소에서는 <춘향전>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인 <금준미주시>를 찾아 시의 원천을 추적하였고, 작품 외적 요소에서는 남원 고을을 거쳐 간 부사들 가운데 임기를 제대로 채운 부사를 검토하고, 나아가 남원 부사가 남원 고을에 재임할 당시 그 아들의 연령이 청소년 시기에 해당하며, 그 아들이 훗날 암행어사가 되어 다시 남원으로 내려온 인물이 존재하는지를 고려했다.




주지하다시피 문학작품에서 작가는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작품이 작가의 체험이나 사상, 감정 등 전기적 사실과 관련되어 해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판소리계 소설은 모두가 작자 미상이라고 알고 있었으며, 지금까지 <춘향전>도 당연히 미상으로 생각해 왔다. 그런데 조경남 작가설은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찾아 볼 수 있게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조경남 작가설이 사실인가 거짓인가가 아니라 <춘향전> 뿐만이 아니라 모든 고전소설을 다양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총체적으로 재해석 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담양군 객사리와 남산리 일원에 걸쳐 있는 관방제림(천연기념물, 제366호)은 푸조나무, 느티나무, 음나무, 개서나무, 곰의말채나무, 벚나무 등 다양한 식생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학술적인 의미도 크지만 제방을 쌓고 유실되거나 붕괴되지 않도록 나무를 심어 보호한 우리나라 몇 안 되는 현존하는 호안림(護岸林)으로 선조들의 치수(治水)에 대한 지혜가 돋보이는 공간이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진전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모여 살게 되었다. 따라서 맑은 공기, 양질의 수돗물, 안전한 생활, 편리한 교통 등에 큰 관심을 가져왔으나 최근에는 쾌적한 환경에 살면서 삶의 질이 높아지는 것을 더 선호하고 있다. 이러한 시민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시정부가 공원이나 녹지를 많이 확보해야하나 재정상태가 열악하기 때문에 바라는 바를 다 해결해 주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공원이나, 녹지조성에 필요한 땅값이 엄청나게 비싸 부지확보가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울이나 대구, 부산, 광주 등 시정부는 시가지 내에 있는 한강이나, 신천, 낙동강, 광주천의 둔치나 제방 등에 나무를 심어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개발하고자 하나 하천법상 나무를 심을 수 없어 불가하다. 수리계통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제방이나 둔치에 나무를 심을 경우 뿌리가 땅을 균열(龜裂)시켜 붕괴를 촉진시키고 큰 홍수 시 통째로 뽑혔을 때 물의 흐름을 방해해 교량이 파손되거나 가옥 등이 침수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피상적인 주장일 뿐 전주(電柱) 등과 같은 지하고가 높은 나무를 심으면 유속에 지장이 없고, 교량 역시 철근과 콘크리트로 만들기 때문에 쉽게 훼손되지 않는 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이러한 신념으로 나는 대구의 시가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신천에 많은 나무를 심었다. 제방에 심은 나무가 붕괴시키기는커녕 보호한다는 사실을 관방제나, 함양의 상림, 하동의 솔숲 등이 잘 증명해 준다. 더욱 가관인 점은 과거 제방을 보호하기 위해 심은 숲이 천연기념물로 보호되고 시민 휴식공간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하천법의 이론이 ?다고 가정한다면 이들 숲은 벌써 사라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현행 하천법은 추상적인 이론이고 제방에 나무를 심은 것을 장려해야 한다. 담양의 관방제림은 나무를 심으면 제방이 오히려 잘 보호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교육장 역할을 톡톡히 하는 특별한 공간이다. 관(官)을 방어(防禦)한다는 숲(林)이라는 뜻과 지역이 객사리(客舍里)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볼 때 이 일대가 옛 담양부의 관아(官衙)가 있던 곳으로 여겨진다.

처음 관방제를 쌓고 나무를 심은 분은 1648년(인조 26)에 부임한 부사 성이성(成以性)이고, 그 후 허물어진 제방을 보수하면서 나무를 심은 사람은 1854년(철종 5)부임한 부사 황종림(黃鍾林)이다. 호남의 웅부이자, 가사문학의 본향이라 할 수 있는 담양 고을에 수많은 수령들이 거쳐 가면서 학문을 장려고, 가난한 백성들을 보살폈을 것이지만 홍수로부터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제방을 축조·보수하신 분은 단 두 분이다.

훌륭한 두 분의 행적을 살펴보기 위해 여러 자료를 열람해보았으나 성이성(1595~1664)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었으나 황종림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자료를 구할 수 없어 뒷날로 미루고 우선 성이성 부사를 찾아 나섰다.

아호가 계서(溪西)인 성이성은 본관은 창녕이나 경북 봉화에서 태어났다. 남원부사와 승지 등을 지낸 아버지 성안의(成安義)와 어머니 예안 김씨 사이에 출생하여 조선 중기 성리학자인 정경세(1563~1633)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616년(광해 8)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어지러운 세태에 물들지 않으려고 벼슬길로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매진했다. 그러다가 1627년(인조 5) 식년시에 응시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정언, 부수찬, 부교리, 지평 등으로 근무했으며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 옳고 그른 것에 대해 지나칠 만큼 엄격하게 따지게 되자 이해 당사자로부터 미움을 받아 승진이 순조롭지 못하고 외직으로 밀려나게 되어 진주, 강계 등 지방수령으로 활동했다. 성품이 강직하기 그지없는 그는 인조가 그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 선조의 다섯째 아들)을 왕으로 추존 하여 종묘에 들이려 할 때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채택되지 아니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기도 했다. 1636년(인조 14)병자호란을 맞아서는 남한산성에 머물고 있는 인조를 구하기 위해 문신이자 친구인 김영조, 김응조 형제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가다가 경상감사 심연을 만나 적군에 길이 막혀 더 이상 접근이 불가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의 참모가 되어 활동하다가 이듬 해 정월 인조가 항복한 후 현직에 복귀하였다. 1647년(인조 25)에는 두 번째 호남 암행어사가 되고 이듬해 담양부사가 되어 관방제를 쌓았다. 그는 담양이외에도 창원, 진주, 강계 등의 부사로도 근무했었는데 고을 마다 송덕비가 세워질 만큼 선정으로 백성들을 보살폈다. 어울려 놀기보다는 혼자 글 읽기를 좋아했으나 찾아오는 사람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정중히 대했다고 한다. 또한 내, 외직을 두루 거쳤지만 재물에 대해서는 초연해 말년에는 매우 가난하게 살았으며, 1664년(현종 5)돌아 가시니 향년 69세였다.

그는 강직한 성품과 굳센 지조로 바른 말을 자주해 주위의 미움을 받아 크게 출세하지 못했다. 그러나 청렴한 생활이 후대에 알려지면서 사후 31년이 되는 1695년(효종 21) 공직자로서는 최고의 영예라고 할 수 있는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저서로는 <계서일고 (溪西逸稿)>가 있다.

그가 태어난 집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의 계서당은 중요민속자료(제171호)로 지정되어 있다. 최근 춘향전에 나오는 이도령이 성이성이라고 주장하는 학자(설성경, 연세대학교)가 나타났고 또한 이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 KBS의 ‘역사스페셜’에도 소개되기도 했다. 아버지 성안의(1561~1629)가 남원부사를 지낼 때 성이성 역시 남원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성춘향과 이몽룡. <춘향전>의 두 주인공은 여지껏 이런 이름으로 알려져 왔지만, 이도령(李道令)은 이제 ‘성도령(成道令)’으로 바꿔 불러야 할 판이다. (춘향의 성은 본디 무엇이었는지 정확치 않다).


'이도령의 본래 이름은 성이성(成以性: 1595∼1664), 조선조 광해군 ·인조 때의 실존 인물이다. 그는 남원부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전라도 남원에 머무르는 동안 기생을 사귀었고 수십년 세월이 흐른 뒤 암행어사가 되어 호남지역을 순행하다가 남원을 찾았다. 성이성은 다시 옛 연인을 만나보려 했지만 사랑하던 그 기생은 죽고 없었다.'
한국 최고의 로맨스이자 4대 국문 소설의 하나로 꼽히는 <춘향전>의 탄생 비밀이 최근 한 국문학자의 끈질긴 추적 끝에 밝혀졌다. <춘향전의 형성과 계통> <춘향전 비교연구>등 굵직굵직한 저서를 내놓으며 지난 30년 동안<춘향전> 연구에 괄목할 성과를 일궈온 설성경 교수에 의해 근 3백년간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던 이른바 '춘향전 신화'의 본디 모습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설 교수는 오랫동안 <춘향전>이야기 '역사적 실체'가 숨어 있을 것으로 가정하고 이를 밝히는데 몰두해 왔다. 그는 최근 자신의 가정을 뒷받침할 결정적인 자료를 손에 넣었다. 성이성 본인의 일기 따위를 후손이 편집해낸 <계서선생일고(溪西先生逸稿)>와 성이성의 4대손 성섭(成涉 : 1718∼1788)이 지은 <필원산어(筆苑散語)>가 그것이다. <춘향전>의 두 주인공 성춘향과 이도령의 실존 인물이었다는 그의 주장은 <조선왕조실록> 등 각종 사료는 물론 민간에서 구전된 설화와도 면밀히 대조·분석해 내린 결론이다.

'십이월 초하루 아침 어스름길에 길을 나서서 십리가 채 안되어 남원땅이었다.. 성현에서 유숙하고 눈을 부릅뜨고 (원천부내로) 들어갔다... 오후에는 눈바람이 크게 일어 지척이 분간되지 않았지만 마침내 광한루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늙은 기녀인 여진(女眞)과 기생을 모두 물리치고 소동과 서리들과 더불어 광한루에 나와 앉았다. 흰눈이 온 들을 덮으니 대숲이 온통 희도다. 거푸 소년 시절 일을 회상하고는 밤이 깊도록 능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원문 생략)

이 구절은 이도령의 실제 인물로 추정되는 성이성 본인의 기록 '호남암행록'(<계서선생일고>에 실려 있음)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여기에서 설교수가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늙은 기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밤잠을 설쳐가며 소년 시절을 회상했다'는 성이성의 진술이다. 설 교수는 "비록 성이성이 직접 옛 연인(또는 춘향)을 말하지는 않았으나, 앞뒤 정황으로 보아 틀림없이 옛 연인을 그리워한 대목이라고 판단된다"라고 말한다.
설 교수에 따르면, 옛 연인(또는 춘향)은 기생이었음이 분명하고, 그 중에서도 관기(官妓)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옛 연인(또는 춘향)이 성이성과 이별한 뒤 연정을 지키려다가 사적인 행동이 용납되지 않는 관기(官妓) 사회의 규제 때문에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이다.
실제인물 성이성의 행적과 <춘향전>주인공 이도령과의 밀접한 관계는 <춘향전>의 '암행어사 출두 장면'에 그대로 유입된 <필원산어>의 한 대목에 의해 더 구체적으로 뒷받침된다. 성 섭은 성이성의 4대손이며, 홍문관 교리·암행어사를 지낸 성기인(成起寅)의 아들이다. 성 섭은 <필원산어>에서 자신의 고조(성이성)가 남원 땅에서 행한 '암행어사 출두사건'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우리 고조가 암행어사로 호남에 갔을 때 암행하여 한 곳에 이르니 호남 열두 읍의 수령들이 크게 잔치를 베풀고 있었다... 한낮에 암행어사가 걸인 모양으로 음식을 청하니 ... 관리들이 말하기를 ‘객이 능히 시를 지을 줄 안다면 이 자리에 종일 있으면서 술과 음식을 마음껏 먹어도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속히 돌아감만 못하리라’... 곧 한 장의 종이를 청하여 시를 써주었다. ‘독에 아름다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소반 위의 기름진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진다.’쓰기를 마치고 내놓으니. 여러 관리들이 돌려가며 보고는 의아해할 즈음 서리들이 암행어사를 외치며 달려들어 갔다. 여러 관리들은 일시에 모두 흩어졌다. 당일에 파출시킨 자가 여섯이나 되었다.'

<필원산어>에 나오는 이 대목은 <춘향전>의 암행어사 출두장면과 다름이 없다. 특히 성이성이 여러 관리에게 보여준 한시(漢詩) 구절은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내보인 한시 구절과 정확히 일치한다. 암행어사 출두 장면은 그것이 판소리 계열의 <춘향가>든, 소설 계열의 <춘향전>이든 예외없이 실려 있는데, 이 중 한 대목 '술독에 아름다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라는 시구는 성이성이 지은 한시 내용 그대로다.
(원문은 '金樽美酒千人血 / 玉盤嘉肴萬姓膏 / 燭淚落時民淚落 / 歌聲高處怨聲高'로 되어 있음).
이쯤 되면 기왕의 <춘향전>은 형성 요소의 절반이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하고 있다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춘향전>의 실제 모델을 밝히려는 노력이 과거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춘향전> 발생(기원)을 해명하는 차원에서 이 문제가 매우 중요한 연구 주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성이성은 일찌감치 60년대에 1대 춘향전 연구가이자 설성경 교수의 스승이던 김동욱 교수(작고)에 의해, 조선조 말 동시대인으로서 저마다 암행어사로 유명했던 노진·박문수·김우항 등과 함께 실제 모델 후보로 거론되었던 인물이다.
당시 김교수는 성이성 관련 설화에 '춘향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설교수는 미완의 연구로 끝난 이 부분에 새로 발굴한 사료와 남원 일대에 흩어져 있는 각종 고사와 춘향 설화를 잇대어 새로운 주장을 내놓은 것이다. 설교수는 이같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춘향전>발생 시나리오를 다시 짜맞추고 있다. <춘향전>발생 경로와 관련하여 기존 학계에서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설득력을 얻어 왔다.
하나는 <춘향전>이 무속(특히 무가)에서 발생해 진화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판소리를 통해 발생·진화했다는 것이다. 설교수는 이에 대해 다른 견해를 내세운다. 즉, <춘향전>은 성이성 등 실존 인물의 역사적 사실을 절반으로 하고 각종 고사·설화 등 허구를 절반으로 하여 한 유능한 작가의 창작에 의해 최초의 텍스트가 성립된 이후, 각양·각층의 민중 참여(첨삭)를 통해 오늘날의 <춘향전>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KBS의 역사스페셜의 프로그램에서 방영되기도 했다.

공의 이름은 안의(安義)요, 자는 정보(精甫)이며 창녕 성씨(咸氏)이다. 고려 때 송국(松國)은 태위개부의동삼사(太尉開府儀同三司)였고, 만용(萬庸)은 판도판서(版圖判書) 보문각태학사(寶文閣太學史)였다. 대대로 명경(名卿)이었으나 조선조에 들어와서 벼슬을 버리고 절의를 지켰다. 증조의 이름은 익동(翼仝) 이고 조부의 이름은 윤(胤)이고, 부친의 이름은 궤(&#32354;)인데 모두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모친은 장연(長淵) 노씨(盧氏)이니 호조참의 사영(士英)의 따님으로 내력이 오랜 집안에서 태어나 유덕한 가문에 배필이 되어 부인과 어머니의 역할에 모두 그 마땅한 도리를 얻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숙성하였다. 겨우 이를 갈 나이에 모친이 남동생을 낳았는데 마침 부친은 외출해서 돌아오지 않았다. 공은 즉시 마당 가운데 표식을 세워서 달의 그림자로 시각을 알아내니 듣는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글을 배움에는 눈으로 보기만 하면 문득 외웠다. 집은 가난하였으나 글 읽기를 좋아했으며 이름 있는 이들에게 종유하면서 배웠다. 장성해서는 한강(寒岡) 정(鄭)선생의 문하에 수업했더니 선생이 매우 훌륭한 인재라고 중히 여겼다.
만력 19년 신묘(1591)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듬해 여름에 왜구들이 난을 일으키자 공은 의병장 곽재우에게 종군하였고, 또 관찰사 백암(栢巖) 김륵(金&#29583;)의 막하에서 종사했는데 백암공은 마음을 기울여 허여하였다. 마침 공이 상배(喪配)하자 백암공이 형의 손녀를 주어 손서로 맞아들이니 공은 이에 어버이를 모시고 영천군(榮川郡)의 처가곳에 가서 살게 되었다. 피난하는 친척들도 또한 그곳으로 갔다.
갑오(1594)년에 예각부정자(藝閣副正字)를 거쳐서 봉상시참봉(奉常寺參奉)으로 옮겼다가 정자(正字) 저작(著作) 박사(博士)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봄에 전적(典籍)에 오르고 몇 차례 옮겨서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에 이르렀고, 가을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임명받고 나서 조금 있다가 예조좌랑(禮曹佐郎)이 되었다. 겨울에 외직으로 나가 관서막(關西幕)을 보좌하였는데 이때는 난리를 당해서 사무가 매우 번잡했으나 일을 잘 처리한다는 명성이 있었다.
병신(1596) 겨울에는 외직으로부터 돌아와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이 되고, 이듬해 가을에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다가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으로 옮겼다. 또 다음해 가을에는 나라에서 관리중에 위엄과 명망이 있어 시국을 잘 처리할 수 있는 이를 차출해서 군향(軍餉)을 공급하고 황정(荒政)을 살피도록 했는데 공이 병조좌랑으로 영남 조도사(調度使)의 임무를 받아 기미에 따르고 기회에 응해서 곧바로 처리한 일이 많았다. 이때 서애(西厓) 류문충(柳文忠)공이 영남을 순무했는데 공에게 시국을 구제할 수 있는 재능이 있다고 극구 칭찬하였다.
때마침 어버이의 병환으로 공이 휴가를 얻었더니 총독사(據督使)인 윤승훈(尹承勳)이 평소부터 공에게 앙심을 품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관직을 버리고 자리를 이탈했다는 것으로 무고하였다. 마침내 옥리에 회부되어서 일이 어찌 될 줄을 알지 못하였으나 문충공(文忠公)이 장계(狀啓)를 올려 변호한 덕분에 풀려나서는 더욱 스스로 힘을 다하여 병사들을 먹이고 주린 백성들을 진휼하니 군국(軍國)의 일이 이에 힘입음이 있었다.
경자(1600) 가을에 일을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가니 공적을 칭찬하는 소리가 매우 자자하여 당시의 의론이 장차 높은 요직을 맡기려 하였다. 그러나 공은 어버이께서 연로한 탓으로 봉양을 청해 영해부사로 나가서 백성들의 사정을 어루만지고 학교를 숭상하고 장려하였다. 4년간 치정을 온 경내가 칭송을 하였다.
갑진(1604)년 가을에 어버이께 병환이 있어서 창녕으로 돌아왔는데 연이어 어버이를 여의게 되었다. 장례를 마치고는 묘소 옆에 영모재(永慕齋)라는 재실을 지어 성묘할 때 잠시 머무르는 장소로 삼았고 독례(讀禮)하는 여가에 고을의 자제들을 가르치니 멀고 가까이에서 배우러 와서 성취한 이가 많았다. 상을 마친 뒤 남원부사에 제수되었는데 고을이 크고 일이 번거로운 곳이어서 본디 다스리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러나 공은 폐단을 혁신하고 잔민을 소생시키며 일을 결정해서 처리함에 막힘이 없었다. 공무의 여가에는 자주 고을 사람들 춤 어진이를 맞아 서로 학문을 강론하고 시를 읊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어사(御使)가 공의 행정에 대해 남다른 공적이 있다고 칭찬하는 내용의 글을 조정에 올리자 주상께서 특별히 총애하는 뜻으로 벼슬을 내리려고 하였으나 이를 저지하는 이가 있어서 그 일은 성사되지 못하고 말았다.
신해(1611)년 봄에는 광주목사로 옮겼는데 공의 후임으로 남원부사가 된 이가 당시 재상의 사주를 받아 공의 허물을 찾았으나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하였다. 겨우 한 해가 지나서 마침내 요직에 있는 이의 뜻에 거슬린 탓에 관직을 그만두고 영천으로 돌아왔다.
물러나 조용히 지낸 12년간에 자주 덕망있는 선비들을 따라서 노닐고, 또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사람들과 함께 임천(林泉)에서 교분을 가지며 소요 자적하였다. 이때는 광해군의 정치가 어지럽고 세상의 도리가 크게 무너졌으나 공은 이에 대해 과격하지도 않고 꺾이지도 않아서 향방(鄕邦)의 존중을 받았다. 도덕을 존중하고 숭상하는 일에는 반드시 솔선해서 사림의 앞장에 싫으나 집안의 자제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계해 반정(1623)후 조정에서 덕망이 있고 명철한 이들을 불러들일 때 공은 사성(司成)으로서 상의원정(尙衣院正)으로 옮겼다가 봉상시정(奉常寺正)으로 바뀌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공은 임금을 공주까지 호종했다가 돌아왔는데 그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오르고 조금 뒤에 제주목사에 배명되었다. 조정의 의론이 공의 연로한 것을 민망히 여겨 보내려고 하지 않았으나 공은 “신하된 도리로 어려움을 사양치 못할 것이라.”하고는 곧바로 부임지로 갔다. 어질고 관대한 정사를 행하자 백성과 아전이 공의 덕을 기렸다.
병인(1626) 봄에 어떤 일에 관련되어서 파직되어 돌아왔다. 숭정 무진(戊辰,1628)년에 서용(敍用)되어 무반의 직함을 가지고 있다가 곧 승정원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를 배명 받았으나 신병으로 사직하고 부름에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1629) 2월 모일에 집에서 세상을 마치니 69세였다. 이해 모월 모일에 영천군 동쪽의 석현(石峴) 경향원(庚向原)에 장사지냈는데 유명을 따른 것이었다. 19년 뒤인 정해(1647)에는 선무원종공(宣武原從功)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추증하였고 또 아들 이성(以性)이 영국공(寧國公)에 들었던 까닭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知經筵義禁府春秋&#33304;成均館事) 홍문관대제학(弘文&#33304;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33304;大提學)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더 추증하였다.
공은 두 부인이 있었다. 앞서의 부인은 황씨(黃氏)이니 첨추(僉樞)인 근(瑾)의 따님이고 뒤의 부인은 김씨(金氏)이니 참판에 증직된 계션(繼善)의 따님이다. 5남 5녀를 두었으니 맏아들 이침(以&#24561;)은 어진 행실이 있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고 지평에 증직되었으며 다음은 이각(以恪)인데 이 둘은 황씨에게서 났다. 다음은 이성(以性)인데 화현(華顯)의 직책을 두루 지내고 통저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라 청백리로 드러났고 다음은 이염(以恬)과 이항(以恒)이다. 딸은 각각 참봉 이억&#23991;李巖), 사인(士人)박두(朴枓), 이천표(李天標), 이문한(李文漢), 문과에 오른 권도(權鍍)에게 출가했는데 모두 김씨에게서 났다.
지평은 2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창하(昌夏), 창리(昌李)이다. 이각은 4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응하(應夏), 경하(慶夏), 도하(度夏), 서하(瑞夏)이다. 통정은 5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진사인 갑하(甲夏), 석하(錫夏), 득하(得夏), 용하(用夏), 참봉인 문하(文夏)이다. 이각은 4남을 두었으니 명하(命夏), 정하(正夏), 시하(時夏), 대하(大夏)는 생원이다. 이항은 혈육이 없어서 득하(得夏)로 뒤로 이었다. 내외의 손과 증손과 현손 남녀 모두 100여 명이나 된다.
공은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스러웠고 형제들과는 우애가 있었으며 집안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빈객과 벗을 맞이하는 데는 정성과 믿음을 다해 속이지 않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또 남의 잘못을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 구차하게 합하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이 흠모하고 함께 사귀었다. 공은 너그럽고 온후하고 아름다운 풍치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거인장자(巨人長者)라고 추중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널리 배우고 두루 통하였는데, 특히 마음으로 헤아리고 계획을 잘 해서 관리로 있을 때는 일처리에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백성을 사랑하고 옛법을 따르는 것을 힘썼고 임의로 고치고 변경해서 심각하게 하는 것을 능사로 삼지 않았다. 분수에 편안해서 스스로 만족하였으며 일찍이 슬퍼하고 조급해 한다든지 영리를 찾아 치달리는 계획을 하지 않았다.
동 시대의 사우로서는 월천(月川), 우복(愚伏), 동계(桐溪), 창석(蒼石)같은 여러 노(老)선생들이 있었고 사서(沙西) 전식(全湜)은 막역한 벗이었다. 공이 돌아가신지 60여 년 뒤에 창녕 사람들이 부용당(芙蓉堂) 곁에 서원을 지어서 이공(李公) 장곤(長坤)과 병향(&#20006;享)을 하였으니 그곳은 공이 평일에 강론하고 교수하던 곳이었다.
현일(玄逸)이 뒤늦게 태어나서 공을 직접 뵙지는 못했으나 공이 영해부사로 왔을 때 우리 조부 참판공이 백성의 예절로 공을 섬겼고, 공도 또한 더불어 벗을 삼아 매우 교분이 두터웠으며, 우리 선친의 형제들도 공의 여러 자제들과 종유하면서 공이 행하던 의리를 익히 듣고 매양 즐거이 말씀 하시곤 했다. 내 같은 어리석은 이도 귀로 익히 듣고 마음으로 그렸더니 지금 공의 손자인 용하(用夏)가 가첩을 받들고 와서 나에게 비명(碑銘)을 짓기를 당부하고 거듭 세의로써 책려하기에 나는 이에 사양하지 못하고 드디어 서문을 쓰고 명(銘)을 짓는다. 명에 이르기를
선비가 덕이 넉넉하면 재능이 부족하고
재능이 넉넉하면 행실이 온전치 못함이 많으니
이 둘을 겸하기는 예부터 어렵도다
공은 이미 아름다운 덕을 가졌고,
또 그 재주와 꾀는 시국의 간난을 건지기 충분했으니!
그 평생의 수수한 자취가
어찌 선인(善人) 군자(君子)가 아니겠는가?
아아! 지위가 재능에 따르지 못했으니
때와 명(命)인지라 어찌하랴!



v 이계석님 (2011-07-15)
너무 글이 길어요. 두번 내드라도
주제 별로 요약해서 내셔요. 그렇지 않으면 책에서 그대로 배껴서,아니면 책을 복사해서 낸것이나 다름 없어요. 열정은 좋으나 일근 사람은 짜증나고 효과도 없어요? 알아 들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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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주부 (2011-07-14)
그동안 이계석씨하면,
문화재를 보전을 위하여 열심히 봉사하여
문화재청유공자상을 받은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훌륭하신줄을 이제서야 알았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묻혀 있던 중요한 역사적인 자료를
사이버 공간에서 학자답게 제시하셨군요.....
남원의 역사 조경남의병에 관한것과 이도령에에 관하여
명쾌하게 자료를 통하여 입증하신것 보니 대단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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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시민 (2011-07-14)
역시 전통문화보존회 이계석이사장님께서
춘향이를 제대로 조명하여 주신것 보아하니 대단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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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고맙소 (2011-07-14)
이러한 장문의 자료를 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렇지 아니래도 이러한 자상한 내용을 알고 싶었습니다. 남원사람들과 남워 춘향전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는 고마운 자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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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답변 (2011-07-14)
알았으니 그만해요. 한사람이 너무나 도배를 하시네..............
이쯤되면 논쟁이 아니라 폐해에요 그만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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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전통문화 보존회 (2011-07-14)
원래 이곳은 조선 세종 원년(1419)에 황희가 광통루라는 누각을 짓고, 산수를 즐기던 곳이었다. 1444년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가 광통루를 거닐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이곳을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칭한 후 ‘광한루’라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1461년 부사 장의국은 광한루를 보수하고, 요천의 맑은 물을 끌어다가 하늘나라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었다.

호수에는 지상의 낙원을 상징하는 연꽃을 심고,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에 가로막혀 만나지 못하다가 칠월칠석날 단 한번 만난다는 사랑의 다리 ‘오작교’를 연못 위에 설치하였다. 이 돌다리는 4개의 무지개 모양의 구멍이 있어 양쪽의 물이 통하게 되어 있으며, 한국 정원의 가장 대표적인 다리이다.

1582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정철은 광한루를 크게 고쳐 짓고, 은하수 연못 가운데에 신선이 살고 있다는 전설의 삼신산을 상징하는 봉래·방장·영주섬을 만들어 봉래섬에는 백일홍, 방장섬에는 대나무를 심고, 영주섬에는 ‘영주각’이란 정자를 세웠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왜구들의 방화로 모두 불타버렸다.

현재의 광한루는 1639년 남원부사 신감이 복원하였다. 1794년에는 영주각이 복원되고 1964년에 방장섬에 방장정이 세워졌다. 이 광한루원은 소설 『춘향전』에서 이도령과 춘향이 인연을 맺은 장소로도 유명하여, 1920년대에 경내에 춘향사를 건립하고 김은호 화백이 그린 춘향의 영정을 모셔 놓았다.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오절에는 춘향제가 열린다.



광한루원은 은하수<銀河水>를 상징하는 연못가에 월궁<月宮>을 상징하는 광한루와 지상<地上>의 낙원인 삼신산<三神山>이 함께 어울려 있는 아득한 우주관<宇宙觀>을 표현한 한국 제일의 누원<樓苑>이다. 원래 이곳은 조선<朝鮮> 세종<世宗> 원년<元年>(1419) 황희<黃喜>가 광통루<廣通樓>라는 작은 누<樓>를 지어 산수<山水>를 즐기던 곳이다. 세종 26년(1444) 전라도<全羅道> 관찰사<觀察使> 정인지<鄭麟趾>가 광통루에 노니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이곳은 달나라 미인 항아<姮娥>가 사는 월궁 속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한후 광한루<廣寒樓>라 이름을 고쳤다.

세조<世祖> 7년(1461) 남원부사<南原府使> 장의국<張義國>은 광한루를 중수<重修>하고 요천<蓼川>의 맑은 물을 끌어들여 하늘나라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고,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은하수에 가로막혀 만나지 못하다가 7월 7석날 단 한 번 만난다는 사랑의 다리 오작교<烏鵲橋>을 연못 위에 설치하였다. 이 석교는 네 개의 홍예<虹霓>로 구성되었는데, 한국 조원<造苑> 공간 속에 있는 가장 대표적인 다리이다.

선조<宣祖> 15년(1582)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정철<鄭撤>이 광한루를 크게 고쳐 짓고 연못 속에 신선이 살고 불로초<不老草>가 있다는 봉래<逢萊>섬, 방장<方丈>섬, 영주<瀛洲>섬의 삼신도<三神島>를 만들고, 봉래섬에는 백일홍<百日紅>, 방장섬에는 대나무를 심었으며, 영주섬에는 영주각<瀛洲閣>이란 정자를 세웠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왜군이 남원성을 침공하여 광한루가 불타고 누원이 모두 황폐하였다. 선조 40년(1607)에 작은 누각이 복구되고, 인조<仁祖> 17년(1639)에 남원부사 신감<申鑑>이 현재의 광한루를 복원하였다.

정조<正祖> 18년(1794)에는 영주각이 복원되고, 1964년에 방장섬에 방장정<方丈亭>이 건립되었다. 이 광한루원은 소설 『춘향전<春香傳>』에서 이도령과 춘향이 인연을 맺은 처소로도 유명하여 1920년대에 경내에 춘향사<春香祠>를 건립하고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화백<畵伯>이 그린 춘향의 영정을 모셔 놓았다.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오절<端午節>에는 춘향제가 성대히 열린다.
매년 4월 초 8일날 남원시내 일원에서 축춘향제 제 81회를 치르면서 전국에서 많은 장춘객들이 남원을 단여갓었다,

또한 남원은 산국시대에 백제와 실라 국경지역으로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으며 지리산과 백두대간 줄기 지리산 천갈래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이곳 광한루원을 거쳐 섬진강으로 흐르는 남원 살기좋은 고장이며 물맒고 공기좋은 춘향과 이목룡의 발원지이며 홍부와 놀부 발상지고 변강쇠 옥녀 고향이기도 하다,
[사] 전통문화 보존회 남원시 안내를 하고 있는 지킴이들 림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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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암행어사 (2011-07-14)
종 목 명승 제33호

명 칭 광한루원(廣寒樓苑)

분 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조경건축/ 원

수량/면적 69,795㎡

지 정 일 2008.01.08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천거동 78번지 등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공유,사유

관 리 자 남원시


신선의 세계관과 천상의 우주관을 표현한 우리나라 제일의 누원이다.

원래 이곳은 조선 세종 원년(1419)에 황희가 광통루라는 누각을 짓고, 산수를 즐기던 곳이었다. 1444년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가 광통루를 거닐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이곳을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칭한 후 ‘광한루’라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1461년 부사 장의국은 광한루를 보수하고, 요천의 맑은 물을 끌어다가 하늘나라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었다.

호수에는 지상의 낙원을 상징하는 연꽃을 심고,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에 가로막혀 만나지 못하다가 칠월칠석날 단 한번 만난다는 사랑의 다리 ‘오작교’를 연못 위에 설치하였다. 이 돌다리는 4개의 무지개 모양의 구멍이 있어 양쪽의 물이 통하게 되어 있으며, 한국 정원의 가장 대표적인 다리이다.

1582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정철은 광한루를 크게 고쳐 짓고, 은하수 연못 가운데에 신선이 살고 있다는 전설의 삼신산을 상징하는 봉래·방장·영주섬을 만들어 봉래섬에는 백일홍, 방장섬에는 대나무를 심고, 영주섬에는 ‘영주각’이란 정자를 세웠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왜구들의 방화로 모두 불타버렸다.

현재의 광한루는 1639년 남원부사 신감이 복원하였다. 1794년에는 영주각이 복원되고 1964년에 방장섬에 방장정이 세워졌다. 이 광한루원은 소설 『춘향전』에서 이도령과 춘향이 인연을 맺은 장소로도 유명하여, 1920년대에 경내에 춘향사를 건립하고 김은호 화백이 그린 춘향의 영정을 모셔 놓았다.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오절에는 춘향제가 열린다.



광한루원은 은하수<銀河水>를 상징하는 연못가에 월궁<月宮>을 상징하는 광한루와 지상<地上>의 낙원인 삼신산<三神山>이 함께 어울려 있는 아득한 우주관<宇宙觀>을 표현한 한국 제일의 누원<樓苑>이다. 원래 이곳은 조선<朝鮮> 세종<世宗> 원년<元年>(1419) 황희<黃喜>가 광통루<廣通樓>라는 작은 누<樓>를 지어 산수<山水>를 즐기던 곳이다. 세종 26년(1444) 전라도<全羅道> 관찰사<觀察使> 정인지<鄭麟趾>가 광통루에 노니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이곳은 달나라 미인 항아<姮娥>가 사는 월궁 속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한후 광한루<廣寒樓>라 이름을 고쳤다. 세조<世祖> 7년(1461) 남원부사<南原府使> 장의국<張義國>은 광한루를 중수<重修>하고 요천<蓼川>의 맑은 물을 끌어들여 하늘나라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고,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은하수에 가로막혀 만나지 못하다가 7월 7석날 단 한 번 만난다는 사랑의 다리 오작교<烏鵲橋>을 연못 위에 설치하였다. 이 석교는 네 개의 홍예<虹霓>로 구성되었는데, 한국 조원<造苑> 공간 속에 있는 가장 대표적인 다리이다. 선조<宣祖> 15년(1582)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정철<鄭撤>이 광한루를 크게 고쳐 짓고 연못 속에 신선이 살고 불로초<不老草>가 있다는 봉래<逢萊>섬, 방장<方丈>섬, 영주<瀛洲>섬의 삼신도<三神島>를 만들고, 봉래섬에는 백일홍<百日紅>, 방장섬에는 대나무를 심었으며, 영주섬에는 영주각<瀛洲閣>이란 정자를 세웠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왜군이 남원성을 침공하여 광한루가 불타고 누원이 모두 황폐하였다. 선조 40년(1607)에 작은 누각이 복구되고, 인조<仁祖> 17년(1639)에 남원부사 신감<申鑑>이 현재의 광한루를 복원하였다. 정조<正祖> 18년(1794)에는 영주각이 복원되고, 1964년에 방장섬에 방장정<方丈亭>이 건립되었다. 이 광한루원은 소설 『춘향전<春香傳>』에서 이도령과 춘향이 인연을 맺은 처소로도 유명하여 1920년대에 경내에 춘향사<春香祠>를 건립하고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화백<畵伯>이 그린 춘향의 영정을 모셔 놓았다.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오절<端午節>에는 춘향제가 성대히 열린다.
매년 사월 초 파일일날 남원시 일원에서 축 춘향제가 열린며 월래는 부쳐님 오시는 날 행사를 해야 하는데 이곳 남원시장이 바끼면서 둘쭉 날쭉하여 춘향제를 치루고 있으니 부모가 돌아가시면 그날을 위하여 제사를 지내는데, 다른날을 위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은 부모에 막심한 호로 자식으로 평가한다,
요줌에는 컴뿌터 시대라 전자기 앞에서 공부도하면 많은 문서를 보관 또는 져장하고 다른 분한태로 전하기도 하는 것인데, 아이들이 배울때 정확하고 거짓업시 전해야 올바르게 가르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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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월매 (2011-07-14)
신선의 세계관과 천상의 우주관을 표현한 우리나라 제일의 누원이다.
현재의 광한루는 1639년 남원부사 신감이 복원하였다.
1794년에는 영주각이 복원되고 1964년에 방장섬에 방장정이 세워졌다.
이 광한루원은 소설 『춘향전』에서 이도령과 춘향이 인연을 맺은 장소로도 유명하여,
1920년대에 경내에 춘향사를 건립하고 김은호 화백이 그린 춘향의 영정을 모셔 놓았다.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오절에는 춘향제가 열린다

원래 이곳은 조선 세종 원년(1419)에 황희가 광통루라는 누각을 짓고, 산수를 즐기던 곳이었다.
1444년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가 광통루를 거닐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이곳을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칭한 후 ‘광한루’라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1461년 부사 장의국은 광한루를 보수하고,
요천의 맑은 물을 끌어다가 하늘나라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었다.

호수에는 지상의 낙원을 상징하는 연꽃을 심고,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에 가로막혀 만나지 못하다가
칠월칠석날 단 한번 만난다는 사랑의 다리 ‘오작교’를 연못 위에 설치하였다.
이 돌다리는 4개의 무지개 모양의 구멍이 있어 양쪽의 물이 통하게 되어 있으며,
한국 정원의 가장 대표적인 다리이다.

1582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정철은 광한루를 크게 고쳐 짓고,
은하수 연못 가운데에 신선이 살고 있다는 전설의 삼신산을 상징하는 봉래·방장·영주섬을 만들어 봉래섬에는 백일홍,
방장섬에는 대나무를 심고, 영주섬에는 ‘영주각’이란 정자를 세웠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왜구들의 방화로 모두 불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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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변사또 (2011-07-14)
광한루원은 은하수<銀河水>를 상징하는 연못가에 월궁<月宮>을 상징하는 광한루와
지상<地上>의 낙원인 삼신산<三神山>이 함께 어울려 있는
아득한 우주관<宇宙觀>을 표현한 한국 제일의 누원<樓苑>이다.
원래 이곳은 조선<朝鮮> 세종<世宗> 원년<元年>(1419) 황희<黃喜>가
광통루<廣通樓>라는 작은 누<樓>를 지어 산수<山水>를 즐기던 곳이다.
세종 26년(1444) 전라도<全羅道> 관찰사<觀察使> 정인지<鄭麟趾>가 광통루에 노니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이곳은 달나라 미인 항아<姮娥>가 사는 월궁 속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한후 광한루<廣寒樓>라 이름을 고쳤다.
세조<世祖> 7년(1461) 남원부사<南原府使> 장의국<張義國>은 광한루를 중수<重修>하고
요천<蓼川>의 맑은 물을 끌어들여 하늘나라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고,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은하수에 가로막혀 만나지 못하다가 7월 7석날 단 한 번 만난다는
사랑의 다리 오작교<烏鵲橋>을 연못 위에 설치하였다.
이 석교는 네 개의 홍예<虹霓>로 구성되었는데,
한국 조원<造苑> 공간 속에 있는 가장 대표적인 다리이다.
선조<宣祖> 15년(1582)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정철<鄭撤>이 광한루를
크게 고쳐 짓고 연못 속에 신선이 살고 불로초<不老草>가 있다는 봉래<逢萊>섬,
방장<方丈>섬, 영주<瀛洲>섬의 삼신도<三神島>를 만들고,
봉래섬에는 백일홍<百日紅>, 방장섬에는 대나무를 심었으며,
영주섬에는 영주각<瀛洲閣>이란 정자를 세웠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왜군이 남원성을 침공하여 광한루가 불타고 누원이 모두 황폐하였다.
선조 40년(1607)에 작은 누각이 복구되고,
인조<仁祖> 17년(1639)에 남원부사 신감<申鑑>이 현재의 광한루를 복원하였다.
정조<正祖> 18년(1794)에는 영주각이 복원되고,
1964년에 방장섬에 방장정<方丈亭>이 건립되었다.
이 광한루원은 소설 『춘향전<春香傳>』에서 이도령과 춘향이 인연을 맺은 처소로도 유명하여 1920년대에
경내에 춘향사<春香祠>를 건립하고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화백<畵伯>이 그린 춘향의 영정을 모셔 놓았다.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오절<端午節>에는 춘향제가 성대히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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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방자 (2011-07-13)
<방자전>이 ‘춘향’을 모독하고 있다며 공식적으로 상영 중지를 요청했다. 춘향문화선양회는 “상업적 영리만을 목적으로 영화를 제작하여 춘향과 방자가 놀아나는 것을 묘사한 것은 춘향의 사랑을 단순 노리개감으로 모독한 것”이라며 <방자전>에 대해 항의했다.

이에 대해 <방자전>을 제작한 ㈜바른손과 시오필름㈜은 보도자료를 통해 “<방자전>은 소설 「춘향전」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영화적인 상상력을 동원해 만든 창작물이며, 이 과정에서 원작을 훼손하려는 의도는 없었음을 밝힌다”고 답했다.

이어서 “이 일을 계기로 젊은 세대들이 고전 미담「춘향전」에 대해 다시 한 번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더불어 이를 많은 분들의 관심으로 여기고 더 좋은 영화로 보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라며 마무리를 지었다.

<방자전>에 대한 이번 논란은 고전을 원작으로 하여 파격적인 재해석을 한 작품들이 한번은 거쳐갈 수 있는 사건이다. 바즈 루어만 감독도 MTV적 상상력으로 재해석한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이와 비슷한 논란을 겪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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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이도령 (2011-07-13)
20세기 초 가장 혁신적인 안무가로 불리웠던 미하일 포킨(1880~1942)이 지난 1936년에 한국의 대표적인 고전 <춘향전>을 소재로 만든 발레 <사랑의 시련>이 71년 만에 복원돼 한국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다.
국립발레단 박인자 예술감독은 16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1900년대 초 유럽 등지에서 떠돌던 <사랑의 시련>의 복원작업이 끝나 오는 31일부터 다음달 3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리는 국립발레단의 제120회 정기공연에서 발레 <춘향>으로 선보인다”고 밝혔다. 그는 “국립발레단의 <춘향>은 원작 <사랑의 시련>의 기본 줄거리와 안무는 그대로 가져오되 임일진 무대미술 감독과 패션디자이너 이상봉씨가 참여해 1936년 공연 당시 중국풍으로 소개된 무대와 의상은 한국적으로 다듬는 등 우리 정서가 담긴 작품으로 재탄생된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포킨 재단쪽에 무대와 의상을 우리나라식으로 하겠다고 제안해 허락을 받았다”며 “춤 동작도 중국풍이 강하지만 어쩔 수 없이 포킨의 안무를 그대로 수용할 생각이다. 그렇지만 춘향을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가 관건”이라고 덧붙였다.

<사랑의 시련>은 미하일 포킨이 우리의 고전 <춘향전>을 소재로 ‘고전발레의 전통 속에서 혁신을 주장한’ 그의 독특한 안무와 모차르트 음악을 사용해 발레작품으로 만들어 1936년 몬테카를로 발레단에 의해 초연됐다. 이 작품은 1960년대까지 유럽에서 공연되었으며, 지난해 말 <춘향전>을 소재로 한 것이라는 문헌자료가 발견되면서 국립발레단이 복원작업에 들어갔다.

포킨의 <사랑의 시련>은 줄거리가 <춘향전>과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작품의 배경과 등장인물도 중국식이다. 춘향의 어머니인 월매 대신 딸을 이용해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아버지 ‘만다린’이 등장하고, 몽룡은 양반가의 자제가 아닌 이름없는 가난뱅이로 등장한다. 또한 변사또는 돈 많은 ‘외교관’으로 바뀐다.

박 단장은 “포킨의 <사랑의 시련>은 동화적이면서도 코믹하고 재미있어 누구나 좋아할 만한 발레작품이다”며 “국립발레단에 의해 새롭게 재탄생되어 문화상품으로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는 뛰어난 작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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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향단이 (2011-07-13)
춘향전 아는 곳까지의 설명 (원작 스포) : 춘향이 그네타는 데 이몽룡이 봄 데려오라고 하니까 팅김 나비가 찾아오지 꽃이 찾아오냐고 그것에 반해서 오고 첫날부터 뜨거운 밤을 보냄 그리고 사귀다가 이몽룡이 한양으로 떠난다고 할 때 분노해서 이것저것 부숨고 울었으나 얼마나 울었으며 춘향이 눈물 방죽이 되었는고?

춘향전이변사또가춘향이따먹는이야기이면 심청전은딸내미인신매매로팔아넘겨돈버는거고 홍길동전은양반집이복동생이도둑되는이야기고 콩주팥쥐는 잘못행동하면죽어서젓갈된다는이야기고(원작입니다) 흥부전은 먹고살기도힘든데애나주구장창낳아서가난에쪼달리다가판타지적으로잘먹고잘살다가 대져 버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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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춘향이 (2011-07-13)
조선조 숙종시대, 흥겨운 농악놀이가 펼쳐지는 단오날 남원부 자제 이몽룡(조승우)은 몸종 방자를 앞세우고 광한루 구경을 나선다. 그네놀이하는 처녀들의 무리 속에서 춘향(이효정)을 발견한 몽룡은 그만 넋을 잃고 방자를 재촉해 불러 오게 한다. 몽룡은 춘향 어미인 기생 월매에게 춘향과의 백년가약을 원한다는 뜻을 밝히고 자신의 마음이 영원히 변치않을 것임을 맹세한다. 하지만 몽룡의 아버지 이사또가 동부승지로 승진, 내직으로 가게 되고 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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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빛광석 네티즌별점9.0 이리 오너라 업고~놀자~캬~! 조승우와 이효정 진짜 춘향전에 나오는 나이인 16살에 찍었다는데 그 풋풋함이 조금 어눌했지만 현실감 있게 잘 그려냈고 판소리 또한 멋졌다.임권택 아니면 누가 이렇게 판소리를 실감나게 그대로 그려낼 수 있을까

v 시민 (2011-07-16)
장수군에 왜장을 죽인 논개열사님이 있지만 논개로 먹고 살지 않는다.
사과와 한우로 먹고 살고 있다.
v 국문학박사 (2011-07-14)
춘향전의 작가를 알아 낸다면 당신은 국문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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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원작자 조경남 (2011-07-14)
원작자 조경남설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헌데 남원은 소설속에 춘향이로 먹고 살려고 하고 있다.
아주 멍청한 생각이 아니고 무엇인가!
춘향이에게 바친 시 예산이 지금까지 얼마인가를 보면 알것이다.
그 돈을 산업에 투자했더라면 지금 남원은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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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춘향전의 작가는 의병장 조헌의 수제자였으며 그 역시 의병장이었다.
2- 조경남은 남원에서 70평생을 살았으며 남원과 광한루에 얽힌 사간에 정통하였고 춘향의 비극적 사건과 그 사간으로 생긴 설화의 내력을 잘 알고 있었다.
3- 산서 조경남은 이도령모델인 계서 성이성의 스승이며 암행어사가 된 그를 광한루에서 다시 만났고 이부사 모델인 부용당 성안의 남원부사와도 교류가 깊은 자 였다.
4- 춘향전은 조경남이 이 사간에 근거해서 집필 한 것이다
v 고전문화연구원 (2011-07-14)
성이성어사의 출생지가 봉화라면 창녕에서 춘향제 개최설은 더욱 멀어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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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의 작가는 산서 조경남 의병장 / 춘향의 성씨는 여전히 미상 -------------------------------------------- 이미지 전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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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문화 지킴이님의 글에 대한 답변입니다.

우리나라 고전문학에서의 두 여주인공 성춘향과 황진이는 여성상으로서 다분히 대조적인 면을 지니고 있으면서 또한 공통점도 있다. 성춘향은 작중 인물이고, 황진이는 실존 인물이었으므로, 이둘을 대조, 고찰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를 수도 있겠으나, 비정상적 가정의 여인이었다는 공통점에 근거하여 인간적인 면을 모색하여 대비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라 하겠다.

성춘향은 소설「춘향전」의 여주인공. 기생 매월의 딸로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과 백년가약을 맺었으나, 부사의 서울 전근으로 헤어지게 되었으며, 새로 부임한 변학도의 수청 강요를 거절하여 옥에 갇혀 온갖 고초를 당하다가, 암행어사가 되어 돌아온 이몽룡에 의해 구출되고 훗날 왕에 의해 정렬부인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된 여인이다.

이에 비해 황진이는 조선 중종 때의 명기(名妓)로 기명이 명월(明月), 서민의 딸로 태어나 아름다운 용모와 총명으로 15세 무렵, 동네 총각이 짝사랑을 하다가 상사병으로 죽는 것을 보고, 자진하여 기계(妓界)에 들어가 동기(童妓)로서 대성하였는데, 시서음률(詩書音律)이 당대의 독보였으며, 문인, 학자와 교유하여 그들을 매료시켰다. 지족선사(知足禪師)를 파계시켰고, 명월이 불러준 시조 한 수에 벽계수(碧溪守)가 도취하여 말 등에서 떨어졌다는 일화도 있다. 국문학사상 황진이의 위치는 전통적인 민족의 리듬으로 교방(敎坊) 여성들의 정과 한을 시조로 표상한 데에 있다. 그의 작품은 기교적이면서도 자유로이 애정을 노래하고 있다.

성춘향과 황진이는 다같이 신분적 차별 대우가 심한 시대에 정상적인 대접을 못 받았다. 한 사람은 기생의 딸로, 한사람은 바로 기녀의 신분으로 지냈다는 면에서 그 처지에 공통성이 있다.
그런데 퇴기 매월의 딸인 춘향은 도도하게도 어미대를 잇는 기생을 마다하고 여염집 처자로 지내고 싶어 했는데 비해, 황진이는 오히려 시생을 자원, 평생을 만인의 여성으로 보냈다는 면에서 대조적이었다.

두 사람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둘 모두가 옛날 여인으로서는 드물게 글 공부를 많이 하여 시와 문장으로 남성과 대등한 위치에서 대화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었다는 데에 있다. 춘향은 학식이 뛰어난 사또의 아들 이몽룡을 상대하여 시문(詩文)으로 어울릴 수 있었으며, 황진이 또한 시서(詩書)는 물론, 가무(歌舞)에 있어서도 타고난 예술적 자질을 발휘하여 못 남성을 매혹시켰다. 자기 집앞을 지나가는 벽계수에게'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라는 옥을 굴리는 듯한 헝아한 노랫소리로 마음을 흔들어 나귀 등에서 떨어지게 하였으며, 당대의 도승(道僧) 지족선사를 파계시켰다는 일화는 유명하지 않은가?

춘향과 이몽룡의 대화 가운데, 이몽룡이 "오늘부터 몸단장 정히하고, 수청으로 거행하라."고 주문하자, "분부 황송하오나, 일부종사 바라오니 분부 시행 못하겠소."하고 거절하였다. 이몽룡이 수차 간곡히 재촉하는 말을 듣고, 춘향이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요, 열불경이부절(烈不更二夫節)을 본받고자 하옵는데, 수차 분부이러하니 생불여사(生不如死)이옵고 열불경이부(烈不更二夫)오니 처분대로 하옵소서."하며, 이몽룡의 입에서 결국 "네 말을 들어보니 어찌 아니 기특하랴. 우리 둘이 인연 맺을 적에 금석뇌약(金石牢約:[쇠나 돌처럼 굳고 변함없는 약속]맺으리라"는 대답을 이끌어내는 등, 평범한 여인에게서는 볼 수 없는 유시한 대화들을 수 없이 나누었다.

그 외에도 춘향이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한다고 매 맞을 때에 문자를 써가며 대꾸하는 말에 한 대를 딱 치니"일편단심 굳은 마음 일부종사 뜻이오니 길개 형벌 치옵신들 일각인들 변하리까?" 등등 굴귀가 유식하다. 황진이의 경우에는 문학적인 면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대표적인 시조 두 수만을 옮겨 그 문재를 음미해 보는 것이 더 좋겠다.

어져 내일이여 그럴 줄을 모르던가
있으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몰라 하노라

가 버린님을 그리워하는 정을 절묘하게 나타내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정든님 오신날 밤이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사랑의 진실을 표현함이 귀신같지 않은가? 황진이는 자신의 인생 진로를 일찌감치 스스로 결정하여 평생을 소신대로 산여인이었다.

성춘향과 황진이는 다 같이 고대사회에서 미천한 신분으로 불운하게 태어났다. 그러나 일생을 살아가는 방법에 있어서는 대조적인 면을 보여주면서 역사적 고대 여성으로 이름을 남겼다.
춘향은 우리나라의 전통적 여성의 전형인 요조숙녀형으로 평생토록 한 지아버지를 섬기고 절개를 지키는 여성이었다. 그에 비해 황진이는 남달리 지성과 재주와 풍류를 갖춘 여성으로서, 자신이 뭇 남성의 여인이 되겠다는 특이한 인생관을 갖고 일생을 마친여걸이요, 개방주의자였다.

춘향은 한 남성의 품안에서 절개를 지키고 살아가는 것을 최대의 행복으로 알고 정절을 지키며 살아간 데 비하여, 황진이는 한 남성에의 봉사에서 만족치 않고, 뭇 남성을 상대로 그들과 어울려 풍류를 즐기고 인생을 엔조이하며, 당당하게 맞서 사귀면서 살아갔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남성을 깔보고 놀리기까지 하는 기질과 우월성을 지닌 여인이었다.

황진이는 그가 몇 개월 또는 몇 년의 기간을 두고 계약 결혼을 하여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우리 역사상으로 볼때, 확실히 걸출한 여인이었고 개방형 여성이었음을 말해 주고 잇으니 어쩌면 일찍이 여성 해방과 남녀평등을 부르짖은 선구자라 할 만하다.
그런 면에서 춘향이는 그 작품을 통하여 남녀평등 사상을 부르짖었고, 황진이도 여성이 남성 못지 않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현실로 보여 준 평등주의자였으니 여기서도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전.선양회원 (2011-07-16)
벙어리가 입을뗀다니만 2011년 아무말하지마소 불운을 맞는 현지집행부 현회장이 전문
지식없소 하-하-하 방자전 --김문수사건---시청 조례 사건 어떻게 처세가 거지요
글이라고 ㅠ성씨 어떻고 설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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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기생춘향 (2011-07-14)
미친것들 춘향이를 두번 죽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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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좋은 생각 (2011-07-13)
좋은 생각입니다
아마도 춘향제나 춘향전 대한 새로운 인식이 남원의 자긍심을 알리는 계기가 될것입니다
첨언한다면,
우리 남원과 창녕의 자매결연도 좋은 방법이며
춘향제에 초청을 할때는 학문적으로 인정을 받을수 있는 학자도 함께 참여를 시키는 것이 훨씬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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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홀엄씨 (2011-07-13)
기생 치마자락이나 팔어먹은 것들이 이모양이니,뭐 ㅇ 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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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도통동 주민 (2011-07-13)
문화의 교류, 동서화합, 춘향제 제고, 남원시민 단합. 남원 공기 쇄신 ,
백번 찬성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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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반대 할 사람 (2011-07-13)
한명도 없을 것입니다.
추진체를 만들어 추진 해 봅시다. 밑져야 본전이고. 그러나 효과는 지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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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선양회원 (2011-07-13)
침체되고 고루하며 날로 쇠락하고 있는 춘향제와 남원의 분위기를 반전.쇄신 할수 있는 건설적이고 창의적인 방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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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좋 소 (2011-07-13)
백번찬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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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창의성 (2011-07-13)
모든 개혁과 발전은 창의성이 있어야 하고 실천력이 있어야 합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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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창녕 성씨 음모설 (2011-07-13)
음모설을 한방에 날 릴수 있는 획기적인 제안입니다. 이문제를 이유로 역사적인 사실을 외면하고 있는 일부 인사들에게 걸림돌을 치원 줄 수 있는 좋은 활로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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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남원시민 (2011-07-13)
열렬히 환영합니다.
거참 기발한 아이디어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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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경남지사를 (2011-07-14)
경남지사를 춘향제전위원장으로 그리고 전북지사를 경남 어느 문화축제때 교차 위원장으로 추대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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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성어사 축제 때 (2011-07-13)
창녕에서 성어사 축제 하면 남원시장이 제전위원장 하기로 하고 서로 바꾸어 하면
기가 막힌 시너지 효과 폭발하는데 개발이 자식은 애 이리 개발이자식같은 말만하는것이여? 정말 미쳤구만은 미친 말만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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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몽룡, 춘향 은 실존인물이었다의 사료와 자료를 편찬해서 발간해야 합니다.
춘향문화 선양회에서도 할 수 있고,춘향제전위원회에서도 특별 사업으로 가능하며
남원시청에서도, 남원고전문화 연구회, 서남대 국문학과 에서도 할수 있을 것입니다. 문화원에서도 할수 있을 것입니다. 도청 도의회 문화 진흥기금을 신청 할수도 있습니다. 이문제는 도의원들이 서둘면 백번 가능합니다. 설성경교수 저서, kbs역사스페셜, 방자전 솟장, 창녕성씨 문중자료, 그리고 국내외 춘향전관련 학자들의 연구논문을 모두 취합하는 것입니다.

이관계 사료를 모두 취합하여 한권의 백서로 발간한다면 이는 커다란 문화사업과 업적이 될 것입니다. 남원에 내로라 하는 문화 관계 인사들이 많은데 말로만 행세하지 이러한 실질적이고 값어치 있는 일은 못 한단 말입니까?
v 왜 이리 난리들이여 (2011-07-13)
역발상이란 것이 있어요.
발상을 꺼꾸로 해 보는것. 누가 남원시장 없다고 했나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악발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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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개발이자식 (2011-07-13)
남원에도 사람이 있는 무순소리 ㅇ ㅑ?
이 호로자식아,
찬녕군수를 위촉하여야 한다고 죽일넘이구나,
ㅇ ㅔ ㄲ ㅣ 이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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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정말 미첬구만 (2011-07-13)
누구야
남원시장이 있는데 무슨 망발이여
선양회원들 수준이라곤
츠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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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남원서민 (2011-07-13)
그것도 졸은 방안이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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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하대식.이상현 (2011-07-13)
두 도의원들만 들면 그까짓 책 한권 발행 못 해요?
명문있지, 이름 날리지! 그런데 그 양반들 도대체 그런 문화 정책 개념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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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객증가 (2011-07-14)
암행어사 얼굴 기리개 등 당시의 자료 전시는 춘향제의 관객을 증가시키는데 있어서도 도움이 돨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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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옳습니다. (2011-07-15)
그 말씀이 옳은 말씀이예요.
v 좋은 아이디어 (2011-07-14)
참으로 수준 높은 아이디어 입니다. 그분 때문에 역시 춘향제의 내용이 격조높을 것 같습니다.
님께서는 제안의 진의를 아직 알아차리지 못하신것 같습니다. 아니면 재미있는 사람이 이던지요. 제안자의 뜻은 성씨의 대결이 아니라 실제 암행어사 성도령이 창녕 성씨이고 또 창녕성씨 음모론도 제기 되었다고 해서, 그 분들을 초청하면 그런 문제도 소멸되고,또 전국적ㄴ시너지효과- 파급효과가 기대 될 뿐만 아니로 춘향제품격도 올라 갈 것이니 양수 겹장이 아닌가? 물론 김칫국부터 마시는 격이 될련지 몰라도...
초청자는 차기 시장이던지, 선양회장이던지, 제전위원장이 하여야 할 것이고, 무슨 성씨 대결이 아니니, 이 제안은 제갈공명도 찬탄 할 제안같은데 왜 역사의 증인님은 댓글마다 럭비공 튀는 식의 질문만 하시나요?

v 남원사랑 (2011-07-13)
의미 있는 큰 사업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남원의 애향운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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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 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또 조경남(趙慶男)이란 설(설성경)이 있다. 소설의 이본(異本)이 120여종이나 되고,제목도 이본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단일 작품이 아닌 작품군인 '춘향전군(春香傳群)'이라고 보아야 한다. 판소리로 불리다가 소설로 정착되었으리라고 보이는 판소리계 소설의 하나이나 문장체 소설로 바뀐 것도 있고, 한문본도 있다. 창극·신소설·현대소설·연극·영화 등으로도 개작 되었다.

한국문학 작품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고 사랑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연구 또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여러 가지 문제점이 거듭 논란되었다. 남원부사의 아들 이도령과 기생의 딸 춘향이 광한루에서 만나 정을 나누다가, 남원부사가 임기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가자 두 사람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이별한다. 그 다음에 내려온 신관(新官)이 춘향의 미모에 반하여 수청을 강요한다. 그러나, 춘향은 일부종사(一夫從事)를 앞세워 거절하다 옥에 갇혀 죽을 지경에 이른다. 한편, 이도령은 과거에 급제하여 어사가 되어 신관 부사를 탐관오리로 몰아 봉고파직(封庫罷職)시키고 춘향을 구출한다. 이도령은 춘향을 정실부인으로 맞이하여 백년해로를 한다. 그런데 이본에 따라서 춘향이 다르고, 춘향과 이도령의 결연이 가지는 성격에 차이가 있다.

신관 부사가 춘향에게 수청을 강요한 것이 얼마나 부당하냐 하는 점도 일정하지 않다. 이 작품은 설화를 소재로 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어 근원설화(根源說話)탐색이 여러모로 이루어 졌다.

그 내용은

① 신원설화(伸寃說話) : 남원에 춘향이라는 기생이 있어 아자제도령을 사모하다가 죽었으므로 원귀가 되어 남원에 재앙을 가져오므로 액풀이하는 제의설(祭儀說두)에 근원을 두고, 양진사(梁進士)가 제문으로 창작하였다는 설,

② 암행어사실화(暗行御史說話) : 노진(盧縝), 조식(曺植)·성이성(成以性)·김우항(金宇杭)·박문수(朴文秀) 등의 고사에서 야담으로 형성된 암행어사 출두의 설화가 <춘향전>이 부연되었다는 데에서 <춘향전>이 그 주제를 따왔다는 설,

③ 조선조 야담에 보이는 도령과 기생과의 애련설화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설(成世昌의 설화가 이에 해당된다.)인데, 이는 <춘향전>전반부의 제재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④ 기타 설화 : <춘향전>속에 삽입된 제재로서의 춘향이 이도령에게 수기(手記)를 받는 이야기, 춘향이 판수에게 해몽을 청하는 이야기, 암행어사 출두장면에서 이 어사의 '금준미주(金樽美酒)'한시의 작시(作詩) 설화 등이 조선조 야담에 나옴으로써 이를 수용하였다는 설,

⑤ 이들 설화가 열녀설화(烈女說話) 및 조선조 유교윤리와 결부, <춘향전>생성의 제재가 되었다고 보는 설 등이 있다.

주 장 자
연세대학교 설성경 교수, 문과대학 인문학부, 춘향전 계통연구 논문으로 박사학위 받음. 연구관심 분야 : 한국고전문학 및 춘향예술사 분야
'설'교수는 지난 '99. 11. 3.과 11. 23. 일본 및 국내에서 ‘이몽룡의 러브스토리’라는 주제의 연구 논문을 통해 공식 발표.
본 주장관련 보도일지
1999. 11. 18. 조선일보 '이몽룡은 실존인물' 제하 보도
1999. 11. 18. 매일신문 '춘향전 이몽룡은 실존인물' 보도
1999. 12. 1. 대구일보 '춘향전 이몽룡은 실존 인물이었다' 보도
1999. 12. 2. 시사저널 '성춘향과 이도령은 실존인물이었다'보도
1999. 12. 4. KBS1 TV 역사스페셜 '이몽룡은 실존인물 이었다' 방영.
1999. 12, 7. 신경북일보 '이몽룡은 봉화사람' 보도
1999. 12. 7. 매일신문 '봉화군 춘향전 이도령 생가 복원한다' 보도
1999. 1.2 8. 국민일보 '봉화 이몽룡 생가' 관광사업 추진' 보도
1999. 12. 8. 영남투데이 '이몽룡의 생가는 봉화' 보도
1999. 12. 9. 대한매일 '춘향전 주인공 이몽룡은 실제 인물' 보도
1999. 12. 10. 양백신문 '춘향전 이몽룡 봉화사람' 보도
1999. 12. 13. 매일신문 ' 봉화서 성장한 청백리 성이성 춘향전 이몽룡 실존인물확실' 보도 등
"성춘향과 이도령은 실존인물이었다" 주장의 내용 요지
성춘향과 이몽룡. <춘향전>의 두 주인공은 여지껏 이런 이름으로 알려져 왔지만. '이도령(李道令)으로 알려져 왔으나 ‘성도령(成道令)’으로 바꿔 불러야 할 판이다.(춘향의 성은 본디 무었이었는지 정확치 않다).

'이도령의 본래 이름은 성이성(成以性: 1595∼1664), 조선조 광해군 ·인조때의 실존 인물이다. 그는 남원부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전라도 남원에 머무르는 동안 기생을 사귀었고 수십년 세월이 흐른 뒤 암행어사가 되어 호남지역을 순행하다가 남원을 찾았다. 성이성은 다시 옛 연인을 만나보려 했지만 사랑하던 그 기생은 죽고 없었다.'

한국 최고의 로맨스이자 4대 국문 소설의 하나로 꼽히는 <춘향전>의 탄생비밀이 최근 한 국문학자의 끈질긴 추적 끝에 밝혀졌다. <춘향전의 형성과 계통><춘향전 비교연구>등 굵직굵직한 저서를 내놓으며 지난 30년 동안<춘향전> 연구에 괄목할 성과를 일궈온 설성경 교수에 의해 근 3백년간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던 이른바 '춘향전 신화'의 본디 모습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설 교수는 오랬동안 <춘향전>이야기 '역사적 실체'가 숨어 있을 것으로 가정하고 이를 밝히는데 몰두해 왔다. 그는 최근 자신의 '가정'을 뒷받침할 결정적인 자료를 손에 넣었다. 성이성 본인의 일기 따위를 후손이 편집해낸<계서선생일고(溪西先生逸稿)>와 성이성의 4대손 성 섭(成涉 : 1718∼1788)이 지은 <필원산어(筆苑散語)>가 그것이다. <춘향전>의 두 주인공 성춘향과 이도령의 실존 인물이었다는 그의 주장은 <조선왕조실록> 등 각종 사료는 물론 민간에서 구전된 설화와도 면밀히 대조·분석해 내린 결론이다.

'십이월 초하루 아침 어스름길에 길을 나서서 십리가 채 안되어 남원땅이었다.. 성현에서 유숙하고 눈을 부릅뜨고 (원천부내로)들어갔다... 오후에는 눈바람이 크게 일어 지척이 분간되지 않았지만 마침내 광한루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늙은 기녀인 여진(女眞)과 기생을 모두 물리치고 소동과 서리들과 더불어 광한루에 나와 앉았다. 흰눈이 온 들을 덮으니 대숲이 온통 희도다. 거푸 소년 시절 일을 회상하고는 밤이 깊도록 능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원문 생략, 고딕체 강조는 편집자)

이 구절은 이도령의 실제 인물로 추정되는 성이성 본인의 기록 '호남암행록'(<계서선생일고>에 실려 있음)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여기에서 설교수가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늙은 기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밤잠을 설쳐가며 소년 시절을 회상했다'는 성이성의 진술. 설 교수는 "비록 성이성이 직접 옛 연인(또는 춘향)을 말하지는 않았으나, 앞 뒤 정황으로 보아 틀림없이 옛 연인을 그리워한 대목이라고 판단된다"라고 말한다.

설 교수에 따르면, 옛 연인(또는 춘향)은 기생이었음이 분명하고, 그 중에서도 관기(官妓)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옛연인(또는 춘향)이 성이성과 이별한 뒤 연정을 지키려다가 사적인 행동이 용납되지 않는 관기(官妓) 사회의 규제 때문에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이다.

실제인물 성이성의 행적과 <춘향전>주인공 이도령과의 밀접한 관계는 <춘향전>의 '암행어사 출두 장면'에 그대로 유입된 <필원산어>의 한 대목에 의해 더 구체적으로 뒷받침된다. 성 섭은 성이성의 4대손이며, 홍문관 교리·암행어사를 지낸 성기인(成起寅)의 아들이다. 성 섭은 <필원산어>에서 자신의 고조(성이성)가 남원 땅에서 행한 '암행어사 출두사건'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우리 고조가 암행어사로 호남에 갔을 때 암행하여 한곳에 이르니 호남 열두 읍의 수령들이 크게 잔치를 베풀고 있었다... 한낮에 암행어사가 걸인 모양으로 음식을 청하니 ... 관리들이 말하기를 ‘객이 능히 시를 지을 줄 안다면 이 자리에 종일 있으면서 술과 음식을 마음껏 먹어도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속히 돌아감만 못하리라’... 곧 한 장의 종이를 청하여 시를 써주었다. ‘독에 아름다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소반위의 기름진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진다.’쓰기를 마치고 내놓으니. 여러 관리들이 돌려가며 보고는 의아해 할 즈음 서리들이 암행어사를 외치며 달려들어 갔다. 여러 관리들은 일시에 모두 흩어졌다. 당일에 파출시킨 자가 여섯이나 되었다.'

<필원산어>에 나오는 이 대목은 <춘향전>의 암행어사 출두장면과 다름이 없다. 특히 성이성이 여러 관리에게 보여준 한시(漢詩) 구절은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내보인 한시 구절과 정확히 일치한다. 암행어사 출두 장면은 그것이 판소리 계열의 <춘향가>든, 소설계열의 <춘향전>이든 예외없이 실려 있는데, 이 중 한 대목 '술독에 아름다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라는 시구는 성이성이 지은 한시내용 그대로인 것이다.(원문은 '金樽美酒千人血/ 玉盤嘉肴萬姓膏/燭淚落時民淚落/歌聲高處怨聲高'로 되어 있음).

이쯤 되면 기왕의 <춘향전>은 형성요소의 절반이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하고 있다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춘향전>의 실제 모델을 밝히려는 노력이 과거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춘향전>발생(기원)을 해명하는 차원에서 이 문제가 매우 중요한 연구 주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성이성은 일찌감치 60년대에 '1대 춘향전 연구가' 이자 설성경 교수의 스승이던 나손 김동욱 교수(작고)에 의해, 조선조 말 동시대인으로서 저마다 암행어사로 유명했던 노진·박문수·김우항 등과 함께 '실제 모델'후보로 거론되었던 인물이다.

당시 김교수는 성이성 관련 설화에 '춘향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설교수는 '미완의 연구'로 끝난 이 부분에 새로 발굴한 사료와 남원일대에 흩어져 있는 각종 고사와 춘향설화를 있대어 새로운 주장을 내놓은 것이다. 설교수는 이같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춘향전>발생 시나리오를 다시 짜맞추고 있다. <춘향전>발생 경로와 관련하여 기존 학계에서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설득력을 얻어 왔다.

하나는 <춘향전>이 무속(특히 무가)에서 발생해 진화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판소리를 통해 발생·진화 했다는 것이다. 설교수는 이에 대해 다른 견해를 내세운다. 즉, <춘향전>은 성이성 등 실존 인물의 '역사적 사실'을 절반으로 하고 각종 고사·설화 등 '허구'를 절반으로 하여 한 '유능한' 작가의 창작에 의해 최초의 텍스트가 성립된 이후, 각양·각층의 민중 참여(첨삭)를 통해 오늘날의 <춘향전>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KBS 1TV 역사 스페셜 프로그램 방영요지
제 목 : 이몽룡은 실존 인물이었다
담당PD : 장영주
방송일시 : 1999. 12. 4 (토) 20:00∼21:00
방송요지
소설<춘향전>의 주인공 이몽룡이 실제 모델이 있었을까? 있었다면 그는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았던 인물일까? 남원의 성안의 부사의 아들, 성이성. 그가 바로 이몽룡의 실존 인물이다. 그런데 이것을 뒷받침할만한 기록이 전한다. 성이성의 4대 후손인 성섭이 지은 <교와문고 3권>. 여기에는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이 변사또의 잔치연에서 지었다는 한시와 그의 동일한 시가 발견된다. ...<춘향전>의 애틋한 사랑이야기.....

이 또한 조선중기 인조 때 어사 성이성이 암행을 다니면서 쓴 친필<암행일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암행일지>는 암행어사들이 자신의 행적을 적은 어사일지. 성이성은 <암행일지>에 광한루에 들러 소년시절의 일을 생각한 기록을 남겼다. 그렇다면 소년시절의 일은 무었일까? 이 역사 스페셜에서는 이몽룡의 실존설을 입증할만한 구체적인 증거를 대고 그 실존 인물인 성이성의 삶과 행적을 살펴봄.

1) 남원의 도령 성이성
남원 광한루 안에 있는 성안의 부사의 성덕비는 이몽룡 실존설을 증명할 수 있는 중요한 증거 중의 하나다. 성안의는 남원에서 가장 오랜 재임기간을 보낸 부사로, 그에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가 바로 성이성. 그렇다면 성이성은 어떤 인물이길래 춘향전의 모델이 되었는가.

2) '금준미주 천인혈....'
암행어사 출두시 '금준미주 천인혈...'이라는 시가 춘향전에 삽입되게 된 경위가 밝혀졌다. 이 시를 국내에서 처음 소개한 사람은 바로 성이성의 스승 조경남. 이 시는 조경남에서 성이성으로, 성이성에서 춘향전으로 전해진 것으로 확인됐다. 그 사실의 검증.

3) 성섭의'교와문고'
그동안 출처 미상으로 그 일부분만이 <필원산어>로 알려져 있던 책<교와문고>전 3권 최초 공개!!!
성이성의 4대 후손인 성섭이 지은책 <교와문고>에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옥반가효는 만성고라 ......"
<춘향전>의 하이라이트인 암행어사 출두 부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더구나 당일 파직시킨 6명은 세도가의 자제라고 한다. 그렇다면 암행어사 출두는 실제 성이성이 행한 것일까? 그 진위를 밝힘.

4) ‘성몽룡’ 아닌 ‘이몽룡’이 된 까닭
지금까지 발견된<춘향전>의 판본은 100여가지다. 그런데 이 판본들에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저자가 밝혀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었일까? 당시의 시대에는 기생과 사랑 놀음에 관한 책을 지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하물며 거기 나오는 주인공은 더했을 것이다. 양반과 기생의 사랑이야기가 광대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자 성을 바꾸게 된 <춘향전>. 그 사연 들음.

5) 광한루의 잠 못 이루는 밤
암행어사 성이성은 늙은 기생과 늙은 아전이 다녀간 뒤 눈내리는 광한루에서 소년 시절의 일을 생각하고는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인조 25년 12월 1일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춘향은 어떻게 된 것일까?

※역사스페셜팀은 연세대 설성경 교수(국문학과)와는 별도로 성이성의 친필<호남암행록>원본, <교와문고>원본을 최초로 찾아내고, '금준미주'시가 바로 성이성의 스승인 조남경에게서 나왔음을 밝혀낸다.
설성경 교수와는 절반이상 취재가 이루어진 후 만나 의견이 동일함을 확인하고 부분 동행 취재하게 됨니다.
[사] 전통문화 보존회 사무실 063=635=1806
전통문화 연구소 063=626=1806
궁굼한것이 있으며 열락 주새요,


 조경남 장군 남 (2011-07-21)
춘향전에 나오는 위의 시 내용.

금준미주(金樽美酒)는 천인혈(千人血)이요

옥반가효(玉盤佳肴)는 만성고(萬姓膏)라.

촉루낙시(燭淚落時) 민루낙(民淚落)이요

가성고처(歌聲高處) 원성고(怨姓高)라.


금동이의 아름다운 술은 일만 백성의 피요,

옥소반의 아름다운 안주는 일만 백성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높았더라.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
그의 본래 이름은 성이성(成以性, 1595-1664)이며 창녕성씨 후손이다.


춘향전의 <이몽룡>은 실존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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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위대한 남원인 (2011-07-18)
드뎌 춘향을 기생으로 만들었구려. 참 장하십니다.
이제 춘향의 정체성은 기생과 도령, 16세 어린 나이에 저지른 웃지못할 사랑놀음
이게 당신들이 바라는 바입니까?

성이성이 매몰되는 순간 남원은 춘향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아시기나 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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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기생 오라버니 (2011-07-17)
<< 이몽룡은 실존인물이었다. 요약 >>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은 실존인물이며 성은 "이"씨가 아닌 "성"이라는 것입니다. 연세대학교 설성경 교수는 춘향전의 "이몽룡"은 봉화의 실존 인물 "성이성"이었다.- "춘향전"의 비밀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고 KBS 1TV에서 1999.12.4.일 방영한 역사스폐설에서도 이몽룡은 실존인물이었다.라는 주제로 방송을 한적이 있다. 설교수의 말에 따르면 춘향전의 전반 인물은 당시 유행하던 민간 설화나 판소리에서 따 온 듯하나, 후반부의 이몰룡어사의 출현도는 작가(산서 조 경남)이 "계서 성이성어사:를 모델로 한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 그 근거로 성이성의 현손인 성 섭(成涉)의 교와문고(僑窩文藁)에 춘향전의 어사출도 장면과 똑같은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술돼 있다."우리 고조께서 수의어사로 호남지방을 암행하여 한 곳에 이르니, 호남 12읍 수령들이 큰 잔치를 베풀어 술판이 낭자하고 기생의 노래가 한창이었다. 수의어사가 걸인 행색으로 들어가... 지필을 달라하여 樽中美酒千人血 (준중미주처인혈) 盤上佳肴萬姓膏(반상가효만성고) 燭淚落時民淚落(촉루낙시민낙락) 歌聲高處怨聲高(가성고처원성고) : 동이의 술은 천사람의 피요. 소반의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불의 눈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래소리 높은 곳에 원성의 소리 높더라.... 이어 서리의 어사출도가 외쳐지고 당일 파출 수령 6인이고 그밖 6인도 서계 올렸다. 이는 모두 세도가의 자제였다



춘향전에 나오는 위의 시 내용.

금준미주(金樽美酒)는 천인혈(千人血)이요

옥반가효(玉盤佳肴)는 만성고(萬姓膏)라.

촉루낙시(燭淚落時) 민루낙(民淚落)이요

가성고처(歌聲高處) 원성고(怨姓高)라.


금동이의 아름다운 술은 일만 백성의 피요,

옥소반의 아름다운 안주는 일만 백성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높았더라.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
똑바로 보고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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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암행어사 (2011-07-17)
'금준미주 천인혈....'
암행어사 출두시 '금준미주 천인혈...'이라는 시가 춘향전에 삽입되게 된 경위가 밝혀졌다. 이 시를 국내에서 처음 소개한 사람은 바로 성이성의 스승 조경남. 이 시는 조경남에서 성이성으로, 성이성에서 춘향전으로 전해진 것으로 확인됐다. 그 사실의 검증.



3) 성섭의'교와문고'
그동안 출처 미상으로 그 일부분만이 <필원산어>로 알려져 있던 책<교와문고>전 3권 최초 공개!!!
성이성의 4대 후손인 성섭이 지은책 <교와문고>에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옥반가효는 만성고라 ......"
<춘향전>의 하이라이트인 암행어사 출두 부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더구나 당일 파직시킨 6명은 세도가의 자제라고 한다. 그렇다면 암행어사 출두는 실제 성이성이 행한 것일까? 그 진위를 밝힘.



4) ‘성몽룡’ 아닌 ‘이몽룡’이 된 까닭
지금까지 발견된<춘향전>의 판본은 100여가지다. 그런데 이 판본들에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저자가 밝혀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었일까? 당시의 시대에는 기생과 사랑 놀음에 관한 책을 지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하물며 거기 나오는 주인공은 더했을 것이다. 양반과 기생의 사랑이야기가 광대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자 성을 바꾸게 된 <춘향전>. 그 사연 들음.



5) 광한루의 잠 못 이루는 밤
암행어사 성이성은 늙은 기생과 늙은 아전이 다녀간 뒤 눈내리는 광한루에서 소년 시절의 일을 생각하고는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인조 25년 12월 1일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춘향은 어떻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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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玉女 (2011-07-17)
《참고문헌》
仁祖實錄, 國祖榜目, 嶺南人物考, 昌寧成氏世譜, 典故大方全, 南原市 홈페이지. 韓國史大事典(교육도서간), 鄕土紙(宋志香 편저,驪江出版社, 1987.), 奉化의 村落과 地名(奉化郡), 文化遺蹟要覽(奉化郡), 奉化郡誌(奉化郡, 1988), KBS 홈페이지, 시사저널지 '99. 1. 2.자, 朝鮮日報 등 關聯報道 新聞, 韓國古傳文學全集(良友堂, 1979),
韓國古傳小說選(韓國放送通信大學, 1986), 韓國文學史(大韓民國藝術院, 1984), 學習百科大事典(株, 金星出版社, 1994.), 가은유고(稼隱遺稿) 등.

7. 네티즌 여러분께.
'춘향전'의 "이몽룡은 봉화의 실존 인물 '성이성'이었다" 의 발표 및 보도, 역사 프로그램 방영으로 봉화군민은 물론 전국 각처에서 이에 상당한 관심이 집중 문의가 쇄도 본 홈페이지를 통해 소개하여 드리게 되었습니다.
본 내용의 편집에 있어 국한된 참고 문헌에 의존하다 보니 문헌별 연대의 상이·한글 맞춤법 등의 오류가 일부 있으나 내용의 의미를 다 담아내지 못함을 우려 문헌 그대로 옮겼음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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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변강쇠 (2011-07-17)
내용 관련 사항 중 역사적 사실 등 고증자료를 소장하고 계신분은 제출하여 주시면 유용히 활용토록 하겠습니다. 국내의 국사·국어 국문학자님·관련 문중 제위의 긍정적 방향의 많은 의견 주십시오.

본 내용을 주제로 관광 자원의 개발·캐릭터의 개발 등을 추진 할 경우 저 투자 고 효율의 좋은 아이템이나 의견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산바라기님은 문화재 해설사?
와우^^

강릉에서 허균생가일대를 해설사에게 들은적 있어요.
허난설헌과 허균 남애의 불운했던 이야기와 곁들여.
흥미 진진하고 그냥 무심히 지나치던 생가가 다시한번 의미를 되새기고 보게 되더라구요.
보람있는 일을 하시는 산바라기님 부러워요
그렇답니다..
그래서 제 근무날 부석사 오시면 아름다운 부석사
더 멋지게 보실수 있도록 도움 드리고 싶었었는데...
아쉬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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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변사또 (2011-07-17)
성안의(成安義). 1561(명종16) ∼ 1629(인조7) 조선 인조 때 문신. 성의성의 부(父). 자는 정보(精甫), 호는 부용당(芙蓉堂), 본관은 창녕. 창녕 성산(城山) 출신.한강(寒岡) 정구(鄭逑)의 제자. 1591년(선조24) 문과에 급제, 벼슬은 사헌부 지평(持平)에 이르렀고, 영남지방의 조도사(調度使)로서 유성룡(柳成龍)에게 칭찬을 받았으며, 영해(寧海)부사, 남원부사를 역임. 광주목사에 승진하였다. 광해군 때 조정에 순응치 않아 파면, 1623년 인조반정이 되자 13년만에 사성(司成)으로 재등용, 상의원(尙衣院) 봉상시성(奉常寺正)을 지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로 왕을 따라 호종(扈從)하였고, 통정대부가 되어 제주목사로 있다가 한때 면직되었다. 뒤에 우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취임치 않았으며, 죽은 후 이조판서·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성춘향(成春香) : 고대소설 <춘향전>의 여주인공. 남원(南原)의 퇴기(退妓) 월매(月梅)의 딸.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李夢龍)과 백년 가약을 맺고 여러 우여곡절과 난관에 봉착하면서도 절개를 지켜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에게 구출되고 왕으로부터 정렬부인(貞烈夫人)이란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
춘향가(春香歌) : 판소리 다섯마당의 하나.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李夢龍)이 퇴기 월매의 딸 춘향과 사랑하다가 헤어진 뒤, 춘향이 남원 신임 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다가 옥에 갇힌 것을 이몽룡이 전라어사가 되어 구한다는 이야기를 판소리로 짠 것.
가평(佳坪)리, 가두들, 가구(佳邱) : 계서 성이성의 고택이 있는 마을의 명칭으로 약 380 여 년전 창녕성씨 선조가 지금의 안마에 정착하면서 마을 언덕에 가죽나무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고 해서 가구라고 불리워 오다 그 후에 음을 따고 아름다운 언덕이라는 의미로 가평, 가두들, 가구 등으로 불리어 오고 있다.
남원(南原)시 : 전라북도 동남단에 위치하는 시. 백제때 고룡군(古龍郡)이다. 당 고종이 소정방(蘇定方)을시켜 백제를 멸하고 유인궤(劉仁軌)를 검교대방주자사(檢校帶方州刺史)로 삼았다. 그후 신라의 문무왕이 이 땅을 합쳤고, 684년(신문왕4)에는 소경(小京)을 두고, 경덕왕때에 남원으러 개칭하여 남원소경이라 하 였다. 940년(태조 23)에는 부(府)로 고치고, 1310년(충선왕 2)에는 다시 대방군(帶方郡)으로 하였다가 후에 남원으로 고쳤다. 1360년 (공민왕9)에는 또 부로 승격, 1413년(태종 13)에는 도호부로 고쳤다.
세조 때 진(鎭)을 두었고, 관하에 도호부 1, 군 1, 현 9가 있었다. 그후 전국을 23부(府)로 구획할 때, 남원부로 되어 관찰사(觀察使)를 두었다가 이듬해에 부가 폐지되어 남원군으로 되었고 1981년 시로 승격 되었다. 명승고적으로는 춘향사(春香祠), 실상사(實相寺), 남원성지(南原城址), 광한루(廣寒樓), 오작교(烏鵲橋) 등이 있다.
광한루(廣寒樓) : 전라북도 남원시 천거동에 소재하는 조선중기의 목조건물. 규모는 작지만 석주(石柱)위에 세운 누정(樓亭)으로 본래는 광통루(廣通樓) 였으나, 1434년 (세종 16)에 중건되어 정인지(鄭鱗趾)에 의하여 광한루라 개칭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635년(인조 13)에 재건한 것이며 <춘향전>의 전설로 유서 깊은 곳이다. 보물 281호.
오작교(烏鵲橋) : 전설상의 다리. 음력 칠월칠석 저녁에 견우와 직녀의 두 별이 서로 만나게 하도록 까마귀와 까치가 은하수에 모여서 자기들의 몸으로 만든다고 하였다. 또한 같은 이름의 다리가 전라남도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에 있어서, 소설 <춘향전>과 더불어 더욱 유명해졌다.
오작교(烏鵲橋) : 전설상의 다리. 음력 칠월칠석 저녁에 견우와 직녀의 두 별이 서로 만나게 하도록 까마귀와 까치가 은하수에 모여서 자기들의 몸으로 만든다고 하였다. 또한 같은 이름의 다리가 전라남도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에 있어서, 소설 <춘향전>과 더불어 더욱 유명해졌다.
통정대부(通政大夫) : 조선시대 정3품 당상관(堂上官)인 문관·종친(宗親) 및 의빈(儀賓)의 관계(官階)
자헌대부(資憲大夫) : 조선시대의 관계. 초기부터 정2품의 동반(東班 : 文官) 및 서반(西班 : 武官)에게만 주었으나, 말기에는 종친(宗親)·의빈(儀賓)도 이 관계를 썼다.
부사(府使) : 고려 및 조선시대의 관직. '고려사' 식화지 녹봉조에 의하면 개성부(開城府) 및 지사부(知事府)의 수부사라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있어서는 대도호부(大都護府)·도호부사(都護府使 :종3품)를 가리키는 말이며, 경주와 같이 종2품관을 배치하는 부의 수령은 부사라고 하지 않고 부윤(府尹)이라 불렀다.
부제학(副提學) : 조선시대의 관직. 홍문관의 정3품관으로 제학(提學)의 다음이며, 직제학(直提學)의 위인데 정원은 1명이다.
홍문관(弘文館) : 이조 때 경적(經籍)·문한(文翰)·고문(顧問) 따위의 일을 맡아 보던 관청. (동) 웅천도
목사(牧使) : 조선시대의 관직. 전국 8도(道)에 두었던 정3품의 관원으로서 각 고을의 으뜸 벼슬이었다.
경기도 3명, 충청도에 4명, 경상도에 3명, 전라도에 4명, 황해도에 2명, 강원도에 1명, 함경도에 1명, 평안도에 2명으로 모두 20명이 있었다.





성이성은 암행하고 다니다가 11월 25일 순천에서 부득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이후에 한양으로 돌아오게 된다. 돌아오던 중 12월 1일 남원에 들렀다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의심할 것 없이 성이성이 이몽룡의 모델이 되는 것이다.

당연히 성몽룡이어야 할텐데 왜 이몽룡이 되었을까? 춘향전에서는 성씨 성을 몽룡이 아니라 춘향에게 붙혀주었다. 성몽룡이 아니라 성춘향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춘향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경북 봉화에 있는 성이성의 묘지비문에는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가 귀신이 많이 나오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했다"는 기록만이 있다고 한다.

성이성이 역시 남원과 관련이 있다는 얘기다 .인조25년 남원에 가서 들으니 옛사랑 춘향이 처녀로 자결을 했는데, 그 원혼의 심술로 재앙이 심했다고 듣게된다. 남원사람들은 그것이 춘향이의 한 때문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원혼을 달래주기 위해 백지 3장에 춘향제사 위령문을 지어 살풀이굿을 해 가뭄과 흉년을 막았다는 민속설화도 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보면, 정읍사람 유자광의 후손인 남원의 호족이 성안의로 하여금 남원에서 5년 동안이나 무탈하게 근무하게 한 사실을 얻을 수 있다. 춘향전의 원본이 유진한에 의하여 전해진 사실, 광해군의 정읍출신 후궁 개똥이(개시) 실세였을 때에 남원부사 성안의가 일약 동부승지로 승진한 사실을 상고해 보면 알 수 있다. 게다다 성이성이 순행길에 태인, 정읍을 들려서 정읍의 풍속이 된 최치원의 '죽은 처녀귀신 위령제사'를 접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원으로 간 성이성은 춘향이의 죽음을 기생 여진으로부터 듣고 최치원의 글을 모방하여 묘지 제사굿 (지금은 명당굿이라고함)의 긴사연으로 위령문을 지어 위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날밤 최치원의 쌍분기처럼 밤에 성이성(이몽룡)은 숙소에 춘향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는 지도 모른다.

최치원의 당나라 율수현위 와 신라 태산(정읍칠보)태수 시절의 행적과 같다.

춘향의 이야기가 기록으로 전하는 것은 없다 . 다만, 춘향전 안에서만 전해져 올 뿐이다 .

유진한의 책에서 춘향전(춘향연)은 한시의 형태로 처음 나타난다. 그러나 유진한은 자신이 이 이야기의 저자가 아니라 전라도 지방을 여행하다가 이야기를 듣고 적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름의 글귀를 칼로 긁어낸 흔적이 있다 .

유진한은 유씨 본관을 밝히지 않는것으로보아 유자광의 상씨인 영광유씨로 보이며 고의로 숨긴것으로 보인다

기생과의 로맨스는 곧 신분이 붕괴되는 과정을 드러낸 것 성씨 집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실제 몇십년 전부터 성이성에 관심을 가졌던 사실이 있으나 밖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성씨 문중에서는 대대로 이몽룡의 모델이 성이성이라는 얘기가 전해져오고 있었다고 한다 .

성도령이 이도령이 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호남지방을 돌던 성이성은 11월 22일, 순천에서 부득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암행을 끝낸다.
성춘향이는 유씨 집안에서 나온 말이다, 성씨를 밧꾸어서 성이성 암행어사가 지어준 성 춘향이다,





<발전방안>
성이성(成以性). 그는 이 시대의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청백리이며, 하얀 선비이자 눈꽃처럼 고결한 선비의 상이다.
봉화가 길러낸 계서선생. 목민관의 최고 모범이요. 조선과 경상도, 전라도 등의 관리로서 역사의 현장에서 가는 곳 마다 숱한 치적을 남겼으며, 백두대간의 정기를 머금고 태어난 <춘향전>의 주역 이몽룡의 고을. 조선시대의 정신을 배우고 묵어갈 수 있는 건강한 정신문화가 살아 숨쉬는 청정문화의 도장으로, 청정문화와 유학정신을 이어갈 수 있는 문화관광 봉화로 가꾸어 나가는데 전력하여야 하겠다.

세계화, 개방화의 물결과 지방자치제의 시행으로 지역의 균형발전에 대한 군민적 요망 및 삶의 질 향상 등 국내외의 여건 변화와 , 지역의 관광 수급 실정을 고려하여 각종 다양화하는 관광수요에 효율적인 공급체계를 구축하고 경유형의 관광유형을 체류형으로 전환시키고 관내의 전통사찰 유·무형의 문화관광 자원을 연계 발전시키고, 인근 시군의 부석사, 소수서원, 하회마을, 도산서원 및 동해권의 관광자원과 관광 루트화 하는 제반 여건을 조성 봉화군의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먼저 역사적 사실 및 고증작업을 충실히 한 후 관련 가문의 종중과 행정기관의 협의가 우선되어야 할 으로 보이며. 관련 유적지에 대한 구체적인 개발 방안을 강구하여 관광 명소화의 여건 조성, 관련 문화행사 개발, 관련 시(市와)의 자매결연 및 각종 문화행사의 교류등 다각도로 연구추진 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됨.

《참고문헌》
仁祖實錄, 國祖榜目, 嶺南人物考, 昌寧成氏世譜, 典故大方全, 南原市 홈페이지. 韓國史大事典(교육도서간), 鄕土紙(宋志香 편저,驪江出版社, 1987.), 奉化의 村落과 地名(奉化郡), 文化遺蹟要覽(奉化郡), 奉化郡誌(奉化郡, 1988), KBS 홈페이지, 시사저널지 '99. 1. 2.자, 朝鮮日報 등 關聯報道 新聞, 韓國古傳文學全集(良友堂, 1979), 韓國古傳小說選(韓國放送通信大學, 1986), 韓國文學史(大韓民國藝術院, 1984), 學習百科大事典(株, 金星出版社, 1994.), 가은유고(稼隱遺稿) 등.









'춘향전'의 "이몽룡은 봉화의 실존인물 '성이성'이었다" 의 발표 및 보도, 역사프로그램 방영으로 봉화군민은 물론 전국 각처에서 이에 상당한 관심이 집중 문의가 쇄도 본 홈페이지를 통해 소개하여 드리게 되었습니다.

본 내용의 편집에 있어 국한된 참고 문헌에 의존하다 보니 문헌별 연대의 상이·한글 맞춤법 등의 오류가 일부 있으나 내용의 의미를 다 담아내지 못함을 우려 문헌 그대로 옮겼음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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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향단이 (2011-07-17)
성의성의 영정은 예전 보관하고 있었으나 어느 시기 분실된 것으로 그 후손들이 전하고 있으며, 영정을 보관하고 있는 분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
전고대방전(全故大方典)
규장각의 문헌에도 성이성의 청백리 215명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으며, 본 전고대방전(강학석 씀 1915년 1월 20일 초판 발행. 경성부 공평동 55번지 소재 대동인쇄 주식회사 발간)에도 조선 숙종때 청백리로 녹하였다는 기록의 문헌이 보관되고 있다.
사 선(紗扇)
성이성이 조정으로부터 암행어사직을 명받고 암행어사 출두시 얼굴을 가리고 그 직분을 행하였다는 얼굴가리게(사선)가 그의 후손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기 타
그밖에도 계서공파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춘향전>의 이몽룡과 흡사한 행적의 내용이 수록된 문헌들로 성섭이 쓴 필원산어(筆苑散語), 교와문고(橋窩文稿) 전 3권, 계서선생 일고(逸稿: 호남 암행록), 만화집, 가은유고와 성이성이 어려서 글을 읽었다는 계서초당(영주시 소재) 현판의 정자 등 다수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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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방자 (2011-07-17)
어사화(御賜花)
성이성이 1627년(인조5)에 치러진 신년시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임금이 직접내린 종이꽃 어사화 (廣寒香)가 그 꽃받침과 함께 보관하고 있다.
부용당 사당(芙蓉堂 祠堂)
남원부사, 광주목사, 제주목사 등을 지낸 성의성의 부친 성안의(成安義, 호 芙蓉堂 : 1561∼1629)의 넋을 위로하고 추모하기 위한 사당으로 계서당으로 부터 우측으로 약 5백 여 미터 떨어진 곳에 사당의 관리사와 같이 있다.
남원부사 성안의(成安義) 성덕비(成德碑)
성이성이 13세부터 16세에 이르기까지 사또 자제로 남원에 머물게 하였고, 뛰어난 이재(吏才)와 간 곳 마다 치적(治績)이 쌓였으며, 남원부사로 5년간이나 있으면서 쌓아온 그의 선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성덕비가 전라북도 남원시에 소재하고 있다.
부용당(芙蓉堂) 제실
성안의의 뜻과 그 얼을 기리고자 창녕 및 남원시 소재에 건립되어 관리되고 있다.
성이성(成以性)의 묘(墓)
계서 성이성의 묘는 그가 살던 곳으로부터 얼마되지 않고 봉화군과 연접한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뒷산에 자리하고 있으며 석물과 청백리를 녹한 내용과 남원 귀신들을 많이 만난다는 내용이 음각으로 세겨진 비석에 세워져 있다.
창녕성씨 족보
가평리 계서당에는 계서공파 창녕성씨 시조로부터 성안의(15대 손)와 성의성(16대 손) 및 18대손에 이르기까지 선조들의 관직, 후손, 묘소, 배우자 등이 세필로 꼼꼼이 기록된 족보가 보관되어 있다.
교 지(敎旨)



1616년 성이성이 생원시에 합격하였다는 합격 교지(증서)가 그의 후손이 보관하고 있다.
문과 시험 답안지
1627년 성이성이 문과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 시험의 답안지가 규장각 소장 문헌에 같이 보관되어 있다 한다.
국조방목(國朝榜目)
1392년(태조 1)부터 1877년(고종 14)까지의 문과 급제자 명단을 수록한 문헌으로 성이성이 1627년 문과 시험에 합격하였다는 명단도 함께 기록되어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영 정(影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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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향단이 (2011-07-17)
가평리 계서당(溪西堂)
이곳은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301번지에 위치한다. <춘향전>에서 이몽룡의 실제인물로 알려진 성이성 선생이 1610년(또다른 문헌에는 1613년)에 건립하여 문중 자제들의 훈학(訓學)과 후학 배양에 힘쓴곳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 후손들이 중건하였다 한다. 정면 7칸 측면 6칸의 입구자( 口)형으로 되어있다.
팔작 지붕의 사랑채(정면3칸, 측면 3칸)와 중간 문으로 연이어져 있다. 지금은 그의 대 후손 성원기(61세)씨가 관리하고 있다. 현재는 정자 1동과 방안간 1동, 강당 1동과 일부 담장 등은 허물어지고 그 터만이 남아있다.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171호로 지정(1984. 1. 10) 관리되고 있다.
성이성 사당(祠堂)
성이성 선생의 강직 개결(介潔), 소신과 의연(毅然)하였던 청백리 성이성 선생을 추모 흠모 제향하기 위한 사당이 계서당 건물의 정면향 우측 상단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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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월매 (2011-07-17)
성이성(成以性) 1595(선조 28) ∼1664(현종5). 순흥부(영주군:1895년<고종32년>에 군이 되었으며, 1914년 군을 폐하고 화천면·수민단면·수식면등은 봉화에 속하고 그 나머지는 영주로 편입됨) 가평리(현재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출신.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 16대손). 자는 여습(汝習), 호는 계서(溪西). 승지 안의(安義)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예안 김씨(증호조 참판 김계선의 딸). 1616년(광해 8) 진사가 되고, 광해군 때의 난세에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1627년 (인조5년)에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35년(인조 13) 정언·부수찬·부교리를 거쳐 이듬해 지평을 지낸 뒤, 1637년(인조 15) 헌납이 되어 윤방(尹昉)·김류(金 류)·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의 오국불충(誤國不忠)의 죄를 논하기도 했다. 특히 사간을 역임하는 동안 직언으로 일관 하여 주위의 시기를 받아 승진이 순조롭지 못하기도 하였다. 외직으로는 진주 ·강계 등 네 고을을 다스렸는데, 진주때는 어사 민정중(閔鼎重)의 선치(善治)보고로 표리(表裏:옷감)를 받았고, 강계 때에는 삼세(蔘稅)를 모두 면제해주어 백성들이 관서활불(關西活佛)이라는 칭호를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사후인 1695년(숙종 21) 청백리에 뽑혔다. 그는 학업에 열중하여 13세때 정경세(鄭經世)에게 보이니, 정경세가 크게 될 인물이라 하였다. 자라면서 학문에 더욱 증진하여 김굉필(金宏弼)·이연경(李延慶)의 학통을 이은 강복성(康復誠)의 문인이 되었다.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계서유고>가 있다.
(※ 1637년(인조 15) 호서(湖西)지방 암행어사 임, 1639년(인조 17) 호남(湖南)지방 암행어사 임, 1644년(인조 22) 호남(湖南암행어사 면, 1647년(인조 25) 호남(湖南)지방 암행어사 복직)

<일대기>
성리성은 청백리로 강직, 개결(介潔), 소신에 의연(毅然)... 상사앞에서도 과감하였다.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으로 1616년(광해 8) 21세로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조정이 탁란(濁亂)하여 과거에 외면하였다. 1624년(인조 2) 정월 이괄(李适)의 반란에 공주(公州)로 피난하는 왕을 호종(扈從)하는 그의 아버지를 따랐다. 그해 2월에 난리가 평정되어 성균관(成均館)에 유학할새, 그때 공부하는 선비들의 풍습이 매우 문란한 상태였는데, 그가 관의 유생(儒生)을 단속하는 색장(色掌:임원)이 되어, 해이해진 규율을 바로 세우매, 식자들이 칭찬했다.

1627년(인조 5) 식년 문과에 급제,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임용되었다. 1629년(인조 7) 부친상을 당하여 복을 벗고, 정자(正字)에 올라,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에 옮겼다가, 시강원설서(侍講院設書)를 거쳐 1633년(인조 11) 성균전적(典籍)에 올라,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시강원사서(司書)를 지내고, 이듬해 병조(兵曹)-예조좌랑(禮曹佐郞)을 거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인조(仁祖)는 즉위하자, 그 아버지 정원군(定遠君:宣祖의 다섯째 아들)을 왕으로 추존(追尊)하여 종묘에 들이려 하매, 조정에서는 그에 대한 찬반이 엇갈려 여러 해에 많은 논란이 거듭되던 끝에 마침내 원종(元宗)으로 추숭(追崇)되었거니와 이때 간관(諫官)이 된 그는 이에 대하여 자못 강경한 뜻으로 상소(疏)했으니 그대강은 '....... 오늘의 일은 조용히 강구(講究)하여 가장 바른 방도를 찾아 행하고라야, 어버이를 높이는 도리와 종묘(宗廟)의 예에 아울러 유감됨이 없을 것인데, 전하는 한갖 지정(至情)에 가리운바 되어, 평정한 마음으로 사리를 살피지 못하시고 매양 엄중한 분부로 꺾어. "세력에 아부한다", "침흘린다", "사욕을 품음이라"하시니, 대체 전하의 조정에서 일을 말하는 바에 있어서, 전하의 뜻에 거스리 면서 처벌이 따를 것이요, 순종하면 은총과 영화를 얻을 것인데, 구태어 그 이익 됨을 버리고, 그 해로움을 취하는 자의 뜻이 과연 세력에 아부함에, 침을 흘림에, 사욕을 품음에 있다고 하오리까.
만일 조정 신하들이 과연 그런 마음들을 가졌다고, 전하께서 그런 줄을 분명히 아신다 하면 물리치거나 내쫓아야 할 것인데, 이제 이미 그 자리에 두어, 직책을 맡게 해놓고, 한번 뜻에 거슬렸다하여, 정(情)에 벗어나는 말로 강제로 죄를 씌어, 그 입을 틀어막으려 하시니, 이 어찌 성왕(聖王)의 말씀일것이며 신하를 예로 부리는 도리이라 하오리까.’

또 유백증(兪伯曾 : 인조때 참판을 지냄 시호 忠景)의 몇 신하(인조 뜻에 찬성하는 )의 상소를 논함에 답하여, '그 죄는 다만 영합(迎合)이란 두글자이겠는데, ‘영합'은 비록 두 글자이나, 그 해독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니, 예로부터 신하로서 임군을 고혹(蠱惑)하고 나라를 그르치는 것이 영합에 비롯되지 않음이 있는가. 영합이란 그 임군이 하고싶어 하는대로 인도함을 이름인데, 전하의 하고 싶어함이 과연 모두 도리와 경위에 맞으면 영합이란 것이 역시 좋으려니와 만일 그렇지 못한 경우임에도 반드시 영합하려 하면 자칫 말 한마디로 나라를 그러치게 함이 아닐 것인가.

이제 입묘(入廟 : 定遠君을 元宗으로 追尊하는)의 일은 전하의 마음이 꼭 수행함에 있으므로 저네들(영합하는 신하들)도 "수행해야 합니다"고 할것이나, 만일 전하께서 불가하다 하시면 저네들도 역시 불가하다고 할 것이다. 옛날 이윤(李尹)이 태갑(太甲)에게 이르기를 "말이 네 마음에 거슬리면 반드시(그 의미들) 도(道)에 구하고, 말이 네뜻에 순하면 반드시(그 의미를) 비도(非道)에 구하라"했는데, 전하는 어찌하여 이로써 반성하지 않으시는지... 아 - 바른 말 하는 선비는 물러가고 뜻이나 맞추는 사람은 승진하니, 충간(忠諫)의 길은 막히고 영합이 풍습을 이루게 되면 전하의 큰 욕망은 달성할 수 있으려니와, 전하의 나라일은 종당 어찌 될것인가’라고 했다. 상소로 하여 그는 곧 벼슬에서 물러나 돌아왔다.

그해 겨울에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635년(인조 13) 사서(司書)로 복직하여, 수찬(修撰)이 되었다. 이때 그는 인성군(仁城君) 공(珙 : 宣祖의 7째 아들)의 아들 용(用)이며, 여러 목숨을 죽음에서 구원했으니, 이는 그의 보람된 공적가운데 하나라 할 것이다.

-앞서 1628년(인조 6) 유효립(柳孝立)이 대북(大北)의 잔당을 규합하여 역모를 꾀하면서 인성군(仁城君) 공(珙)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하여, 인성군을 자결하게 하고, 연좌처형하기로 된 그 아들 용(用)을 구명하고자 간곡한 뜻으로 상소(疏), 경연(經筵)에서도 여러차례 간절한 진달(陳達)로 용서를 청하매 인조임금이 드디어 감동되어 인성군의 아들 용이 구원됨과 함께, 같은 역률(逆律)에 연좌되어 대년(待年)중이던 사람들도 모두 죽음을 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고도 그는 이런 사실을 전혀 말하지 않았기에, 구원받은 그 사람들 조차 그런줄을 모르게 되었다.

그해(1635년<인조 13>) 가을 ∼이듬해 겨울까지에 수찬(修撰)·교리(校理)·정언(正言)·시강원문학을 두 세차례씩 역임했다. 1636년(인조 14) 겨울 청(淸)의 침략(병자호란)으로 임금이 남한 산성에 피난했는데, 그는 수찬으로 마침 귀향해 있던중 변을 듣고, 망와(忘窩) 김영조(金榮祖)·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와 함께 급히 임금곁으로 달려가던중 충주를 지나다가 경상감사 행영(行營)에서 감사(監司)심연(沈演)을 만났다.

'적군에 막혀 남한산성에는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이니, 차라리 여기서 힘을 바침이 옳으리라’고 하는 감사의 말을 쫓아, 거기서 감사 심연(沈演)의 참모가 되었다. 그의 도타운 충의(忠義)와 비상한 지모(智謀)에 심감사는 감탄을 마지 않았다.

피난 정부가 더 버틸길이 없어, 남한산성에 포위된지 꼭 달반 만인 1637년(인조 15) 정월 그믐날, 마침내 왕이 성을 나와 적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그는 조정에 달려가, 2월엔 진휼어사(賑恤御使)로 경상도 여러 고을을 두루 돌아 지방관리의 정사와 민정(民情)을 살폈으며, 이어 호서(湖西) 암행어사가 되어 탐학(貪虐)한 관원들을 징계하고 선정(善政)이나 미행(美行)이 있는 이를 포상하매 일도(一道)가 숙연했다.

그때, 권신(權臣)들이 서로 알력을 빚어, 공직(公直)한 인품으로 명망을 띤 이성(以性)을 서로 끌고자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삼으려 하매, 그는 욕되게 여겨, 어버이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이로부터 연달아 임명이 있었고, 옛 동료며 친지들도 복직을 권했으나 응하지 않다가, 이듬해 봄 비로소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취임하매, 대신들이 서로 자기파당으로 끌고자, 수찬(修撰) - 이조정랑에 옮기게 하려다가 그의 강직(剛直)한 성품을 알고 물러섰다.

다시 교리·사간(司諫)·호남(湖南) 암행어사 등을 거쳐, 다시 사간·집의(執義)·교리를 지내고, 어버이를 위해 외직(外職)을 구하여, 합천현감(陜川縣監)에 부임했다.

그는 한결같은 청렴공직(公直)으로 갓난 아기를 어루만지듯 성력으로 백성을 돌보았으며, 봉록(俸祿)을 던져, 전임 현감이 축낸 곡식 수천석을 대신 충당했고, 교학을 일으킴에도 힘을 기울렸다. 그때 감사(監司)나 병사(兵使)가 서슬이 대단했으나 이성(以性)에게는 예우가 깎듯했으며, 두간이 감영(監營)- 병영(兵營)에서 재물을 내어, 고을 백성을 구호함에 돕기도 했다.

1644년(인조 22) 어떠한 사건으로 파직되어 돌아왔다가, 그 겨울 시강원필선(弼善)을 거쳐 보덕(輔德)에 옮기고, 이듬해 부수찬(副修撰)이 되어, 청나라 사행(使行)에 서장관(書狀官)으로 (正使는 麟平大君) 북경에 다녀올새, 돌아오는 행장(行裝)에는 다만 침구 한벌 뿐이어서, 부사(副使) 정세규(鄭世規)가 매우 공경했다고 한다.

그해 가을서부터 이듬해(1646년<인조 24>) 여름까지에 교리·수찬을 네차례, 사간(司諫)·사헌부 집의(執義)를 네차례, 시강원 보덕 한차례에 각각 임명되어 혹 취임하기도, 안하기도 했다.

그 6월에 별시(別試) 과거에 고관(考官)이 되어, 주시관(主試官)이 출제를 잘못한 사건에 연루되어 함께 파직되었다가 1647년(인조 25) 7월 다시 교리에 복직되고 겨울엔 또 호남행 어사가 되었으며, 1648년(인조 26) 봄 다시 집의·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를 거쳐 담양부사(潭陽府使)에 부임했다.

1650년(효종 1) 암행어사가 그 치적(治績)을 임금께 알려 표리(表裡)가 하사되고 포상하는 유서(諭書)가 내렸다. 다시 교리(校理)로 불러, 곧 집의(執義)에 재수되고, 겨울에 부응교(副應敎)를 거쳐 다시 사간에 옮겼다.

그때 영남선비들이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이율곡(李栗谷)을 문묘(文廟)에 배향함이 부당함을 상소하고 일도(一道)의 선비들이 과거에 응시하시기를 거부 했던바, '경과(慶科 : 나라에 경사가 있어 보이는 과거)를 거부함은 곧 임군을 무시하는 작태다.'라는 말이 낭자하니, 이에 영남선비들이 또 상소로 변명하여, 우비(優批)가 내렸으나, 일반의 불평이 대단했다.

마침 도내(道內) 어느 장난꾼이 거짓으로 왕의 비답(批答)을 꾸민 사건이 있어, 의논이 몹시 시끄러웠는데, '그것은 앞서 상소한 유생(儒生)가운데서 나왔으리니, 필시 화를 넘겨씌우기위한 계책이리라'함이었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이 모두 몸을 사렸으나, 이성(以性)이 나서서 그 애매함을 힘껏 변명하여, 사림(士林)에 화가 미치지 않도록 했다.

1651년(효종 2) 또 사간 겸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이 되었다. 어느날 가주서(假注書) 이명익(李溟翼)이 경연(經筵)에서 말한 것을 밖에 퍼뜨렸다 하여 임금이 이명익을 나포하여 국문(鞠問)하도록 명령했다.

이번에도 이성(以性)이 임금께 '경연에서의 일은 본래 공개함이 마땅한 것으로, 반드시 숨길일은 아닙니다.'라고 간(諫)했으나, 임금이 노여움을 풀지 않으매, 그는 드디어 사직하고 물러 오려 할새, 마침 <인조실록>이 완성되어, 편찬에 참여했던 춘추관(春秋館) 관원들은 공로로 승진시키는 예임을 들어, 사국(史局)의 동료들이 조금만 지체하기를 권했으나,

그는 '언관(言官)이 되어 말이 쓰이지 못하는 터에 은상(恩賞)을 바라는 것은 너무 부끄러운 노릇이라'하고 결연히 돌아와 버렸으니, 이로 말미암아 그는 더욱 임금의 뜻에 거슬린바 되어, 몇해 동안은 통 임명이 없었다. 이조판서(吏曹判書) 정세규(鄭世規 )가 '이 신하(以性)는 본시 청백하고 근실하기로 알려져, 양조(仁祖·孝宗)를 섬겨 온 경악(經幄)의 신하이온데, 말 한번으로 전하의 뜻에 거슬렸다하여 버릴수는 없습니다.'라고 진언했으나, 임금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1653년(효종 4) 3월 비로소 창원부사(昌原府使)에 제수되어, 그는 사양하지 못하고 부임했다.
이때 조정에서 진영(鎭營)을 설치하고 힘써 군정을 닦으려 할새, 무관들이 세력을 부려, 그에 따른 일로 여러 고을이 고달 팠으며, 또 민가의 노비(奴婢)들을 추쇄(推刷 : 의무를 다하지 않고 도망친 노비들을 찾아 돌려보냄)하는 일, 양반·서민집 노비들이 주인을 배반하고 투입하는 자가 잇달아, 송사(訟)가 분분했다.
이성(以性)은 그 폐를 감사에게 상신함으로써 감사가 나라에 알려 금지케 하매 그 폐단이 훨씬 숙어졌다.
창원은 해변 고을이라 하나, 마포(馬浦) 1면만이 해산물을 공납(貢納)하는 구실을 부담했는데, 이 해에 마포사람들이 죽는 불상사가 있었다. 이성(以性)은 매우 긍휼히 여겨, 그 지역에는 구실을 모두 면제시키고, 해산물 공납까지도 관에서 사서 바치는 등으로 성심으로 민생을 보살피매, 떠나 도망쳤던 백성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그가 다스리기 2년에 백성의 살림이 생기를 되찾게 되었다.
1654년(효종 5) 가을 모친상을 당하여 복을 마치자, 군기시정(軍器侍正)을 거쳐 진주목사(晉州牧使)에 부임했다. 그 고장 서민들은 사람이 죽으면 산기슭에 초빈(草殯)을 하여, 오래도록 매장하지 않는 풍속이 있었다.

이성(以性)은 상가의 이웃이나 친척이 힘을 모아, 반드시 매장(埋葬)을 하도록 했고, 딱한 처지이면 관에서 물자와 식량을 주어, 반드시 매장하도록 시켜, 미개한 풍속을 모두 고치게 했다.
1658년(효종 9) 암행어사 민정중(閔鼎重)이 순안군무(巡按軍務)를 겸하여, 임금의 명으로 진주에서 훈련 사열을 하고 나서 군사에게 향연(饗宴)을 베풀고 상벌(賞罰)을 행할새, 병사(兵使)이하가 모두 분주하고, 두려워 했다. 연회가 끝나고, 병사가 어사를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크게 놀음놀이를 벌여, 어사의 환심을 얻으려 할새, 이성(以性)이 단연 그것을 제지시켜 막아 버렸다.
이를 듣고 어사가 깊이 감복하여, 조정에 들어가 으뜸으로 보고하여, 포상으로 표리(表裡)한벌이 하사되었다.

그 가을, 다시 부교리로 불렸으나 얼마 아니하여, 파직되어 돌아왔다.
효종이 승하하고(1659) 국장도감낭청(國葬都監娘聽)이 되었으며, 6월에 다시 사간이 되었다가 교리에 제수되었다. 10월에 국장을 마치고, 사건으로 물러왔다가 겨울에 다시 집의에 복직, 교리에 옮겼다.
1660년(현종 1) 봄 강계(江界) 백성이 오래 폭정(暴政)에 시달려, 조신가운데서 중망(重望)이 있는 인물을 부사(府使)로 물색, 그에게 임명되었다.

강계는 관서지방의 웅진(雄鎭)이나, 압록강에 면하여 여진(女眞) 땅에 연접되어 있고, 백성이 드물며, 국내 대표적인 산삼곳이라, 거의 산삼캐는 일로 생업을 삼는 고장이었다. 원근의 장사꾼들이 모여들고, 관가에서도 끼어 들어 이(利)를 탐함이 장사꾼 이상이었으니, 서도(西道)일대의 고위관원들, 및 중앙 각 아문(衙門)에서 포백(布帛)을 실어다 맡기고, 그 값어치의 3배에 해당하는 삼을 요구하는 것이었으며, 수령(守令)이 또한 그러하니, 백성의 부대낌이 극심하여 원성은 온 고을에 들끌었다.

그가 부임길에 오르면서, 그 폐단을 여러 대신들에게 알리고, 과감히 바로잡으리라는 결의를 보이매, 정승 이경석(李景奭)만이 그를 칭찬했을 뿐, 대개는 미지근하거나 불쾌하다는 기색들이었다.
그는 부임하자 세삼(細蔘)을 모두 없애고, 서울이며 지방 각 관청의 공안(公案)을 가지고 삼을 구하려는 자는 모두 막아버리매, 백성들이 기쁨과 감격을 마지 못했다.

이 해에 관서지방에 가뭄이 심하고, 메뚜기가 온 들판을 뒤덮어 들어가 푸른 잎사귀란 남아나지를 못했다.
그는 밤낮으로 근심하며, 온갖 방법을 짜내어 구호에 성력을 다했다. 어느날 '감영(監營)에서 비장(裨將)이 공문을 가지고 왔다.'는 아전의 보고를 받고, 그는 필시 '삼 때문이리라' 짐작하고, '만일 공무라면 군사편으로 공문을 보내어 전령할텐데, 어찌 비장(裨將)이 공문을 옷소매에 지니고 와서 수령에게 부탁할 것인가.' 하고 받기를 거부했다.

그 사람이 매우 노하여 돌아가, 거짓으로 보태어 감사(監司)에게 보고하매, 감사가 감탄하기를 '그사람이 그렇듯 엄정(嚴正)하니, 비록 상사(上司)로서도 어찌할 수 없구나.'하고, 뒷날 서울에 돌아가 '성모(成某) 같은 이는 지금 세상엔 한사람뿐이리라'고 칭찬했다. 마침 만포첨사(滿浦僉使) 한휴(韓休)가 '사병이 삼금(蔘禁)을 범했다.' 고 이성(以性)을 무함하매, 조정에서 의논이 분분할새, 혹 겉으로 돕는체 하면서 도리어 그를 옭으려 들었다.

10월에 그를 나포(拿捕)하라는 명이 이르매, 온 고을이 창황하여 울부짖었고, 드디어 의금부(義禁府)로 잡혀가게 되매, 강계부의 백성들이 따라와 어울함을 호소하여 '우리 사또님 같은 은혜로운 다스림은 강계가 생긴 이래 처음이라.'하고, '인삼 2백근을 나라에 바치니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빌었다. 이성(以性)이 듣고 놀라,
'그렇게 함은 도리어 나를 불리하게 하는 일이라.'하고 힘써 달래어 막았다.
그때 '조정에서 이미 사건이 알려졌으니, 응당 사실을 조사하는 사신을 보내라.'하고 강계 사람들이 수천금으로 뇌물을 쓸 계책으로 반년동안이나 서울에 지체하다가 마침내 사신이 오지 않음을 알고서야 돌아갔다.

평안가마 임의백(任義伯)이 장계 파직될새, 말이 인삼 사건에 미치매, 이성(以性)의 청렴함과 애민(愛民)정신을 들어, '관서 지방에서는 산부처(活佛)라는 칭호가 있으니, 그 사람의 죄없음을 알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마침내 단양(丹陽)에 유배되어 11월에 풀렸다. 1663년(현종 4)) 비로소 서용(敍用)되었으나, 이듬해(1664) 2월 7일 70세로 생애를 마쳤다.

◇ ◇

그는 빼어난 의표(儀表)에 단정 장중하여, 아무리 불시에 급한 경우를 당해도 자약(自若)하여 급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일찍 남원에 있을 때, 관아(官衙)안에 귀신의 괴변이 많았다 하나, 그는 조금도 개의함이 없이 밤이면 늘 혼자서 거처하며 태연히 글을 일었다.
그 아버지를 뵈러 제주섬으로 가는 길에 험악한 풍랑을 만나 배가 하마 뒤엎일 듯, 사공도 놀라 소리를 지르며 어쩔줄을 몰라했으나, 그는 편안히 앉아 자세가 여유로우매, 배에 탄 사람들이 안정을 찾게 되었다 한다.

벼슬에 있으면서도 교유(交遊)가 적었으며, 더욱 권귀(權貴)에 가까이 하기를 싫어하여, 인평대군(麟平大君)의 여러 차례의 내방(來訪)에 대하여, 단 한번 답례로 찾은 뒤에는 다시 발길을 하지 않았으니, 그 결벽함을 짐작할만하다. 그는 평생토록 번화함을 싫어하여,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남의 떳떳치 못한 일을 말하지 않았고, 자기의 잘한 일을 나타내는 법이 없었다.

벼슬에 있어서는 절용(節用), 애민(愛民), 청렴(淸廉)을 첫째로 삼아 한결같이 법을 준수하여, 누구도 감히 그에게 사사로운 청탁을 못했으며, 관청이 정숙하고, 안과 밖이 엄격히 격리되어 아문의 관속들도 그 자체의 얼굴을 보지 못했고, 술한잔 국 한 그릇이라도 사사로이 쓰지 못했다. 그래서 그 에게는 간혹 엉뚱한 비방이 있기도 했으나 그는 개의 하지 않았다.

그는 부임한 고을마다 밝은 다스림으로 칭송이 있어, 담양(潭陽), 창원(昌原), 진주(晉州), 강계(江界) 등 고을에 돌이나 구리에 새긴 송덕비(頌德碑)가 있었다.
그는 평거에는 문을 닫고 조용히 글 읽기를 즐겼으며, 손이 오면 아무리 낮고 미천한 사람이라도 한결같이 후하게 대접했다.
만년에는 가세가 기울어 사는 집이 비바람을 가리우지 못할 지경이었으나 살림에 마음을 쓰지않았다.
토지가 읍 가까이에 있었는데, 친지들이 혹 집자리로, 혹은 묘전(墓田)으로 달라고 하여 다 내주어 버렸다.
향읍에 살면서도 심한 시비사건이 아니면 일체 간여하지 않았고, 중년 이후로는 더욱 관문에 발길을 끊어, 아무리 수령이나 감사(監司)가 내방해도 다만 자제를 보내어 회사(回謝)할 뿐이었다.

한 아우가 있었는데, 시냇물을 상거하여 살면서, 화락함이 그지없어 아침에 모이면 저녁까지, 저녁에 모이면 때로는 새벽이 오는 줄을 잊기도 했다. 문장은 간결 담아(淡雅)하여 예사로운 경계가 아니었으나, 그는 문예로 자부하지 않았고 저술도 적은 편이었다. 그는 비범한 자질, 강직한 성품에 맑고 굳센 지조로 하여, 그의 바른 말과 결벽한 처신은 혹 임금께 거슬리고, 상사(上司)의 꺼림을 입어, 그의 진로(進路)는 순탄하지 못했으나, 변방고을로 밀려나 마치고 말았다.

1695년(효종 21)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고, 자손에게 쌀과 콩이 하사되었다.
저서<계서일고(溪西逸稿)>에는 그가 지제교(知製敎)로 임금을 대신하여 지은 교서(敎書)·사제문(賜祭文)들이며, 소(疏)·계사(啓辭)·중국 기행문인 연행일기(燕行日記) ·호남암행록(湖南暗行錄) 등에 수록되어 전한다.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이 행장(行狀)을 짓고, 약산(藥山) 오광운(吳光運)이 갈명(喝銘)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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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이도령 (2011-07-17)
소설<춘향전>의 주인공 이몽룡이 실제 모델이 있었을까? 있었다면 그는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았던 인물일까? 남원의 성안의 부사의 아들, 성이성. 그가 바로 이몽룡의 실존 인물이다. 그런데 이것을 뒷받침할만한 기록이 전한다. 성이성의 4대 후손인 성섭이 지은 <교와문고 3권>. 여기에는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이 변사또의 잔치연에서 지었다는 한시와 그의 동일한 시가 발견된다. ...<춘향전>의 애틋한 사랑이야기.....

이 또한 조선중기 인조 때 어사 성이성이 암행을 다니면서 쓴 친필<암행일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암행일지>는 암행어사들이 자신의 행적을 적은 어사일지. 성이성은 <암행일지>에 광한루에 들러 소년시절의 일을 생각한 기록을 남겼다. 그렇다면 소년시절의 일은 무었일까? 이 역사 스페셜에서는 이몽룡의 실존설을 입증할만한 구체적인 증거를 대고 그 실존 인물인 성이성의 삶과 행적을 살펴봄.

1) 남원의 도령 성이성
남원 광한루 안에 있는 성안의 부사의 성덕비는 이몽룡 실존설을 증명할 수 있는 중요한 증거 중의 하나다. 성안의는 남원에서 가장 오랜 재임기간을 보낸 부사로, 그에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가 바로 성이성. 그렇다면 성이성은 어떤 인물이길래 춘향전의 모델이 되었는가.

2) '금준미주 천인혈....'
암행어사 출두시 '금준미주 천인혈...'이라는 시가 춘향전에 삽입되게 된 경위가 밝혀졌다. 이 시를 국내에서 처음 소개한 사람은 바로 성이성의 스승 조경남. 이 시는 조경남에서 성이성으로, 성이성에서 춘향전으로 전해진 것으로 확인됐다. 그 사실의 검증.

3) 성섭의'교와문고'
그동안 출처 미상으로 그 일부분만이 <필원산어>로 알려져 있던 책<교와문고>전 3권 최초 공개!!!
성이성의 4대 후손인 성섭이 지은책 <교와문고>에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옥반가효는 만성고라 ......"
<춘향전>의 하이라이트인 암행어사 출두 부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더구나 당일 파직시킨 6명은 세도가의 자제라고 한다. 그렇다면 암행어사 출두는 실제 성이성이 행한 것일까? 그 진위를 밝힘.

4) ‘성몽룡’ 아닌 ‘이몽룡’이 된 까닭
지금까지 발견된<춘향전>의 판본은 100여가지다. 그런데 이 판본들에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저자가 밝혀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었일까? 당시의 시대에는 기생과 사랑 놀음에 관한 책을 지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하물며 거기 나오는 주인공은 더했을 것이다. 양반과 기생의 사랑이야기가 광대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자 성을 바꾸게 된 <춘향전>. 그 사연 들음.

5) 광한루의 잠 못 이루는 밤
암행어사 성이성은 늙은 기생과 늙은 아전이 다녀간 뒤 눈내리는 광한루에서 소년 시절의 일을 생각하고는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인조 25년 12월 1일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춘향은 어떻게 된 것일까?

※역사스페셜팀은 연세대 설성경 교수(국문학과)와는 별도로 성이성의 친필<호남암행록>원본, <교와문고>원본을 최초로 찾아내고, '금준미주'시가 바로 성이성의 스승인 조남경에게서 나왔음을 밝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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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사] 전통문화 보존 (2011-07-17)
엣날 양반들은 기생하고 놀아나다가 자기의 신분이 놀출될까 십어서 신분을 바꾸어 부른것이 이목룡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남원 동학 농민군의 주둔지에서도 보면은 양반집에서는 신분을 놀출하지 안고 가명으로 부르는 전라좌도 동학 농민군 김게남 장군 전설의 실화가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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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성이성이 친필로 적은 기록도 있다. 원래 암행어사들은 암행을 다니는 동안 자신의 행적을 일지로 적게 돼 있었다. 성이성이 암행어사를 한 것은 모두 4번. 그 중에 인조 25년 때의 암행을 기록해 놓은 책 한권 만이 유일하게 전한다.

그 책은 4번의 암행어사에서 유일하게 인조 25년 11월 25일 호남지방만을 기록한 것이다. 성이성은 남원에 들어가 춘향의 소식을 알고자 했으나 암행어사는 본인의 연고지에 갈 수 없었던 탓에 순천에서 어사일정을 마치고 평민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성이성은 그의 < 인조실록 암행일지>에서 11월 5일 모두 9명이 암행 채비를 갖추라는 명을 받았지만, 사흘 뒤에는 이해창과 자신 두명만이 봉서를 받아 떠났다고 적고 있다 .낮 12시 남관왕묘에서 봉서를 연 성이성은, 자신의 목적지가 호남인 것을 비로소 알았고 곧바로 길을 떠났다고 한다.

남대문밖으로 나서서 청파역에서 말을 타고, 동작 고을, 남태령을 넘었다. 이어 성이성은 여산, 전주, 태인, 정읍, 고창 등을 거쳐 하루에 백리정도 씩을 가면서 고을수령의 정치를 탐문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춘향전의 이몽룡 역시 서리와 중방을 데리고 다니며 호남지방 일대를 탐문한다. 그러나 성이성의 호남 암행일지에 남원에서 출도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 기록으로 보아 가는 도중 충청도 진천에서 한번 어사출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호남 암행일지에 이런 기록은 없다.
그리고 12월 1일. 남원엘 들어갔다 .이 날은 눈보라가 크게 일어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날씨가 나빴다고 한다. 그런데 성이성은 굳이 이 비바람을 헤치고 광한루로 향했다.

그리고 무슨 연유에선지 늙은기생 여진이 찾아와 함께 얘기를 나눴다고 적고 있다. 늙은 기생과 얘기를 나누었다는 것은 과거 기생과의 일을 아는 기생이기 때문에 그 뒷일이 궁금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가고 난 뒤 성이성은 그 때의 일을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해가 저무니 모든 기생들을 물러나게 하고 작은 동자와 서리와 함께 난간에 앉았다. 눈빛이 뜰에 하얗게 깔려있고 대나무숲이 하앴다...그리고 소년시절의 일을 생각하며 밤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경북 봉화에 있는 성이성의 묘지비문에는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가 귀신이 많이 나오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했다"는 기록만이 있다고 한다.

성이성이 역시 남원과 관련이 있다는 얘기다 .인조25년 남원에 가서 들으니 옛사랑 춘향이 처녀로 자결을 했는데, 그 원혼의 심술로 재앙이 심했다고 듣게된다. 남원사람들은 그것이 춘향이의 한 때문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원혼을 달래주기 위해 백지 3장에 춘향제사 위령문을 지어 살풀이굿을 해 가뭄과 흉년을 막았다는 민속설화도 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보면, 정읍사람 유자광의 후손인 남원의 호족이 성안의로 하여금 남원에서 5년 동안이나 무탈하게 근무하게 한 사실을 얻을 수 있다. 춘향전의 원본이 유진한에 의하여 전해진 사실, 광해군의 정읍출신 후궁 개똥이(개시) 실세였을 때에 남원부사 성안의가 일약 동부승지로 승진한 사실을 상고해 보면 알 수 있다.

성춘향(成春香) : 고대소설 <춘향전>의 여주인공. 남원(南原)의 퇴기(退妓) 월매(月梅)의 딸.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李夢龍)과 백년 가약을 맺고 여러 우여곡절과 난관에 봉착하면서도 절개를 지켜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에게 구출되고 왕으로부터 정렬부인(貞烈夫人)이란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

춘향가(春香歌) : 판소리 다섯마당의 하나.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李夢龍)이 퇴기 월매의 딸 춘향과 사랑하다가 헤어진 뒤, 춘향이 남원 신임 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다가 옥에 갇힌 것을 이몽룡이 전라어사가 되어 구한다는 이야기를 판소리로 짠 것.

가평(佳坪)리, 가두들, 가구(佳邱) : 계서 성이성의 고택이 있는 마을의 명칭으로 약 380 여 년전 창녕성씨 선조가 지금의 안마에 정착하면서 마을 언덕에 가죽나무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고 해서 가구라고 불리워 오다 그 후에 음을 따고 아름다운 언덕이라는 의미로 가평, 가두들, 가구 등으로 불리어 오고 있다

남원(南原)시 : 전라북도 동남단에 위치하는 시. 백제때 고룡군(古龍郡)이다. 당 고종이 소정방(蘇定方)을시켜 백제를 멸하고 유인궤(劉仁軌)를 검교대방주자사(檢校帶方州刺史)로 삼았다. 그후 신라의 문무왕이 이 땅을 합쳤고, 684년(신문왕4)에는 소경(小京)을 두고, 경덕왕때에 남원으러 개칭하여 남원소경이라 하 였다. 940년(태조 23)에는 부(府)로 고치고, 1310년(충선왕 2)에는 다시 대방군(帶方郡)으로 하였다가 후에 남원으로 고쳤다. 1360년 (공민왕9)에는 또 부로 승격, 1413년(태종 13)에는 도호부로 고쳤다.
세조 때 진(鎭)을 두었고, 관하에 도호부 1, 군 1, 현 9가 있었다. 그후 전국을 23부(府)로 구획할 때, 남원부로 되어 관찰사(觀察使)를 두었다가 이듬해에 부가 폐지되어 남원군으로 되었고 1981년 시로 승격 되었다. 명승고적으로는 춘향사(春香祠), 실상사(實相寺), 남원성지(南原城址), 광한루(廣寒樓), 오작교(烏鵲橋) 등이 있다.

v 민근흘언어마을 (2011-07-21)
성춘향 → 퇴기의 딸로, 이도령과 만나 백년가약을 약속하고 끝까지 수절을 하는 여인이다. 물론 이러한 삶의 자세는 전통적인 윤리 의식에 충실한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다운 삶과 신분 상승을 추구하는 근대성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선인군(善人群)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 이몽룡 → 남원부사 이한림의 아들로, 양반 출신이면서도 계급을 초월한 사랑을 실천하는근대적 인물이다. 경판본에서는 전형적인 난봉꾼으로 형상화되기도 하지만, 완판본의 경우에는 의리를 지킬 줄 알고 책임감이 강한 청년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선인군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 변학도 → 당대의 탐관오리를 대표하는 인물로 악인군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반상의 제도를 철저히지키면서 그것을 악용하여 개인적 이득을 추구하고 상민의 신분 상승 의지를 꺾는 관리의 전형이다.
㈃ 방자 → 상전의 위세를 믿고 양반 행세를 하기도 하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양반에게도 능청스럽게 구는 희극적인 인물이다.
㈄ 월매 → 퇴기로 성참판과 동거하면서 춘향을 낳고 신분 상승을 추구하는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인물이다.
㈅ 향단 → 착하고 얌전한 여인으로, 전형적인 종이다.

숙종 대왕 초 전라도 남원부에 월매라는 퇴기가 있었다. 그녀는 아기 갖기를 소원하여 성참판과 동거하여 춘향이라는 아리따운 딸을 낳았다. 자색이 천하에 일색인 춘향은 성장하면서 시서에 능하였다. 어느 화창한 봄날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은 방자를 데리고 광한루에 올라 춘흥에 겨워 시를 읊고 있었다. 이때 춘향은 향단이를 데리고 광한루 앞 시냇가 버들숲에서 그네를 뛰며 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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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서녀 (2011-07-21)
춘향의 이야기는 어렸을 때
부터 많이 들어왔어요. 그때는 아무 생각없이 그저 재미로만 춘향은 사랑하는 사람
과 결혼해서 좋겠다는 생각만 하며 읽었는데.. 지금 고3이 되어 춘향에 대한 이야
기를 다시 접하게 되니 춘향을 다시보게 되었어요. 안 좋은 집안 환경에서 바르게
자란 춘향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부터 든답니다. 만약 춘향이 아니라 다른 사
람이었다면 비행청소년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퇴기의 딸로 태어났지만
성참판의 서녀로 반은 양반이라며 항상 자부심을 가진듯 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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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변강쇠 (2011-07-21)
그러면 춘향이의 출신성분은 어떠한지 한번 살펴보자. 성참판(成參判)의 서녀(庶女)라는 설이 있으나 애비와는 이미 절연된지 오래되어 그 씨가 불분명한데 성(成)씨 성을 가진 어떤 남원 한량(閑良)의 딸일 것이라는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비록 기적(妓籍)에는 그 이름이 올려있지 않다 하나 한 때 관기였던 퇴기(退妓) 월매의 소생으로서 종모법에 따라 춘향이는 당연히 관(官)에 속한 기생인 바, 수청명 거절에 거역관장(拒逆官長)의 죄를 물어 중형에 처함은 당연한 처결이라 아니할 수 없다.



춘향이 비록 본관사또에게는 《속대전(續大典, 1744년 반포)》 제5권 형전(刑典)의 <속량(贖良)>에 의거 대비정속(代婢定屬)하여 면천하였다고 주장하나 춘향이 기생이라는 사실은 주위 사람들 모두가 기생으로 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생들 또한 춘향이를 자신들과 같은 동료로 대하고 있다는 사실관계에서도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성이성의 <어사일지>를 보면 춘향전의 어사 출도 대목에 나오는 유명한 한시가 실려 있다(金樽美酒千人血/玉盤嘉肴萬姓膏/燭淚落時民淚落/歌聲高處怨聲高).

마지막 문장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思少年事 夜深不能寐(사소년사 야심불능매)


성이성이 눈바람을 맞으면서 남원을 찾은 것은 나이 53세 때였다. 8년 만의 두번째 방문이었다. 그전에 순천에서 그는 암행어사 신분을 드러내고 모든 공무를 끝낸 후 한양 길에 올랐다. 그런데 굳이 지름길을 버리고 한참을 에두르는 남원 길을 택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까?

53살의 늙은 몸을 이끌고 눈 내리는 밤 남원까지 와서 늙은 기생과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광한루의 밤 설경을 바라보며 ‘사소년사 야심불능매’를 읊조리는 성이성의 회한을 그려볼 때, 거기에 <사과나무>의 프랭크가 내뱉은 ‘아,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란 말인가!’라는 탄식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무릇 사내들의 사랑 맹세란 매양 봄바람 같고, 젊은 날의 사랑이란 이렇듯 비극으로 흐르기 십상인가 보다.






셋째, 창녕성씨 문중에서는 대대로 이몽룡의 모델이 성이성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왔다. 그러면서 최근에는 성이성을 모델로 했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창녕성씨 문중에서는 기생과의 사랑 놀음에 양반 자제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성 도령이 이 도령이 된 까닭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성 춘향이는 이도령을 기다리다가 죽었으니 이목룡이 찻아올때는 나이가 53살이었으니 변싸또가 죽인것이다, 말하자면 경기도 김문수 같은 인간이 명청한 인간아,

춘향전 안에서만 전해져 올 뿐이다 .

유진한의 책에서 춘향전(춘향연)은 한시의 형태로 처음 나타난다. 그러나 유진한은 자신이 이 이야기의 저자가 아니라 전라도 지방을 여행하다가 이야기를 듣고 적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름의 글귀를 칼로 긁어낸 흔적이 있다 .

유진한은 유씨 본관을 밝히지 않는것으로보아 유자광의 상씨인 영광유씨로 보이며 고의로 숨긴것으로 보인다

기생과의 로맨스는 곧 신분이 붕괴되는 과정을 드러낸 것 성씨 집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실제 몇십년 전부터 성이성에 관심을 가졌던 사실이 있으나 밖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성씨 문중에서는 대대로 이몽룡의 모델이 성이성이라는 얘기가 전해져오고 있었다고 한다 .

성도령이 이도령이 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호남지방을 돌던 성이성은 11월 22일, 순천에서 부득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암행을 끝낸다.
그리고 12월 1일. 남원엘 들어갔다 .이 날은 눈보라가 크게 일어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날씨가 나빴다고 한다. 그런데 성이성은 굳이 이 비바람을 헤치고 광한루로 향했다.

그리고 무슨 연유에선지 늙은기생 여진이 찾아와 함께 얘기를 나눴다고 적고 있다. 늙은 기생과 얘기를 나누었다는 것은 과거 기생과의 일을 아는 기생이기 때문에 그 뒷일이 궁금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가고 난 뒤 성이성은 그 때의 일을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남원에는 전통적으로 억울하게 죽은 춘향얘기가 전해져오고 있다. 춘향이 이도령을 위해 수절을 했다는 그 얘기의 근원이 성이성과 맞닿아 있다. 성이성이 춘향을 두고 떠난 뒤에 일어났던 사건을 남원에서는 그렇게 표현했다고 보인다.

성이성과 춘향과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12월 1일 < 광한루 >의 기록에서 그 가능성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

처녀가 죽으면 길가나 바닥에 매장하여 지나다니는 최치원 같은 남자의 위안을 받고 싶어한다는 신앙이다. 이처럼 죽은 처녀를 길바닥 밑에 묻어 주지 않으면 그 처녀 귀신이 집으로 찾아와 유가족에게 해를 입힌다고 전해진다.

최치원이 쌍묘분에서 글을 쓰고 노래했던 일종의 무당굿 같은 효과를 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춘향이는 너같은 작태 때문에 이번죽어 원한이 서려있는데 한번으로 만족하나 춘향이는 사대부의 딸이다 작태야?


귀하의 주장에대해 감정적으로 대하고싶지 않습니다.
다만, 성이성이가 이몽룡이라고하는 것이 역사적근거에의한 사실이라면
성이성과 관계있는 춘향이라는 인물이 사실인지,
사실이라면 어떤 근거에 의해서 실존인물이라고 하는것인지 입증이 되어야
우리자손들에게 자세히 설명할수있어야 합니다.

"남원 춘향이 본관은 영광유씨 유자광친족 유진한 사대부의 딸이다?"

그렇다면 성춘향이라 부르지말고 유춘향이라 불러야하지않을까?
그런데 왜 성춘향이라 부를까....
춘향이의 일편담심 낭군을 위한 절개는 자손만대로 우리가 본받고
계승해야할 아주소중한 것인데 왜 춘향이의 성씨를 유씨로 바로잡는일을
하지않는것일까?
더구나 유씨문중의 입장에서보면 자랑스러운 가문의 후손인데....
그리고 춘향이의 유골은 어디에 묻혀있을까?
귀하의 주장이 맞다면 유치 문중과 춘향문화 선양회는 춘향이의묘에
자세한내용을 비석에새겨 후손들이 역사를 바로알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과 퇴기(退妓)의 딸 춘향이 광한루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다가 남원부사가 임기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가게 되자 두 사람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이별한다. 신관사또인 변학도는 춘향에게 수청을 강요하나 춘향은 일부종사(一夫從事)를 내세워 거절하다가 옥에 갇히게 된다. 이몽룡은 과거에 급제하고 어사가 되어 돌아와, 탐관오리 변학도의 생일 잔칫날 어사출두하여 변학도를 봉고파직(封庫罷職)하고 춘향을 정실부인으로 맞아 백년해로한다는 내용이다.
춘향의 신분도 이본에 따라 퇴기의 딸, 기생, 성참판(成參判)이나 성천총(成千總)의 서녀(庶女)가 되기도 하여 그 변모에 따라 행동거지도 달라지는데, 이것은 《춘향전》 창자(唱者)인 광대 뒤에서 이를 다듬어 주는 아전(衙前)이나 양반들의 수정을 받으면서 양반들의 구미에 맞게 변질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문학적 작품성은 이보다 조금 앞선 숙종 때 지어진 《구운몽(九雲夢)》에 비하여 뒤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판소리 생성 당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민중적인 환영을 받고 있다. 이는 춘향과 이몽룡의 계급을 초월한 사랑과 신의, 그 당시 봉건윤리에 합치되는 춘향의 열녀적인 행실이 민중의 공감대를 얻었고, 변학도와 같은 특권 계급층의 전횡(專橫)을 응징하는 이몽룡의 모습 등이 양반은 물론, 하층민 누구에게나 환영받을 수 있는 국민문학적 요소를 가졌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한편 판소리로서의 《춘향전》은 과거 더늠으로 한 광대는 많으나 그 창본(唱本)이 남아 있는 것은 별로 없다. 현존본으로 이선유(李善有)본과 박기홍(朴基弘)조에 의한 이해조(李海朝)의 《옥중화(獄中花)》, 이동백(李東伯)본이 있는데 완판(完板)의 《열녀춘향수절가》와 문체상의 차이는 없다. 이본으로는 경판본(京板本) 4종, 완판본(完板本) 3종, 안성판본(安城板本) 1종 등이 있다.
춘향전결초보은 하오리다.

‘결초보은(結草報恩)’은 죽은 뒤에라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중국 춘추 시대에, 진나라의 위과(魏顆)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 서모를 개가시켜 순사(殉死)하지 않게 하였더니, 그 뒤 싸움터에서 그 서모 아버지의 혼이 적군의 앞길에 풀을 묶어 적을 넘어뜨려 위과가 공을 세울 수 있도록 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합니다.
v 진정하소 (2011-07-17)
정도시민님, 그렇게 자학하고 상심 할 필요가 없소이다.
역사는 역사이고 사실은 사실입니다. 부인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춘향전이 실제 역사적사실에 입갓하고 있다는 것은 허구소설보다는 천만배 좋은 일입니다. 허구소설인데 왜 무덤을 만들어서 오랫 동안 제사 지내 옵니까>
아직도 춘향이 성은 밝혀 지지 안하고 있고, 춘향이의 뒷 일은 밝혀 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것은 정도시민이 노력해야 할 사안이고 오히려 그것이 춘향전의 신비를 더 해 주고 있는것이 아니오니까? 그정도의 사료만 가지고도 춘향제와 남원 시민은 정체성과 값어치를 높게 물고 있는 것이니 손해 볼 것은 하나도 없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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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회 활동을 15년 정도 하다가
선양회원이라는 것이 부끄러워 탈퇴한 회원입니다.

선양회가 춘향문화를 선양하기 위한 연구와 노력을
지금까지 얼마나 했느냐를 자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변 여건이 좋지않아 연구와 할동이 미진했다는 말씀에
남원시민들 중에 공감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이번에 시의회에서 선양회 역할을 축소하고
관 주도의 춘향제전위원회를 구성한다고 들었습니다.
이제는 선양회는 춘향문화의 창달과 선양활동에
제전위원회는 춘향제 축제에 매진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그동안 선양회의 주도로 열렸던 춘향제가 문제점이 많다고 공감되는 이 시점에
관 주도의 제전위원회를 구성하여 몇년간이라도 해 보시고
문제점이 노출되면 그때 비교분석하여 보완하면 됩니다.

조례는 언제든지 바꿀수 있습니다.
이번 조례가 선양회의 역할을 축소하려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동안 선양회의 역할과 춘향제의 실상을 본다면
조례를 개정해서라도 춘향제를 좀 더 발전시켜 볼 일입니다.

그래서 윤회장님의 진정서가
몽니를 부리는 글처럼 느껴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선양회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춘향제에 역할확대를 위한 노력이나
역할 축소에 대한 자치단체와의 투쟁이 아니라
춘향문화를 연구하고 전파하는 일에 노력하여
선양회원으로서의 자긍심을 높이고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것입니다.
v 정도시민 (2011-07-16)
일리가 많습니다.
다만 투자에 비하여 이득이 너무 없는 것이 춘향사업 이다는 거죠.
이건 시민 모두가 공감하는 부문 입니다.
춘향사업 안되니까 춘향관광사업 더하라! 더하라!
더해도 손실만 보고 뻔한 멘트적 사업을 계속하라?
미친짓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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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님의 말 (2011-07-18)
남원은 몇몇에 의해서 여론이 몰아지는 군요
앞을 볼줄 모르는 사람에게 무슨 약이 있겠습니까
남원인의 무지를 이해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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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안죽었다 (2011-07-16)
춘향전은 사실에 입각하여( 50%) 설화와 전설과 창작(50%)으로 된것이면 춘향전은 더욱 새로 그 값어치를 안정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허구 소설인데 무슨 춘향묘가 필요 있고 춘향제사를 지냅니까? 원 깝깝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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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사실과 허구 (2011-07-15)
지금껏 춘향전은 픽션(작가의 상상력에 의존한 허구)이라고 알려져 왔지만
새롭게 조명되는 것은 최소한의 사실적관계를 설정하여 픽션으로 재 구성 된것이라고
해서 춘향전이 죽는 다고는 할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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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자유가 (2011-07-15)
그거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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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정도시민 (2011-07-14)
춘향이 때문에 남원이 죽었습니다.
돈 쳐들여 했봤자 손실만 있고...
차라리 만인의 열사총으로 승부를 걸면 좋겠습니다.
춘향은 거의 가상이고/만인의 열사총은 실제 역사이니까요.
실존이냐 아니냐를 놓고 춘향이 죽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주장하는 춘향의 실존론에 대해 깊은 이해와 미래를 보는 안목을 가지지 않고 사실이라며 쓰는 글로인해 춘향은 죽었습니다.
춘향이 죽으면 남원도 그속에 살고있는 우리들의 정체성도 함께 죽습니다.
춘향을 실존화하기 위해 더이상 성이성을 찾지 말아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성이성에 매몰되는 순간 춘향은 죽기 때문입니다.
춘향을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그대로 놓아두세요 부탁입니다.
v 정도시민님 (2011-07-16)
관념론자가 되지 마시고 현실을 똑바로 보세요.
남원이 100이라면 춘향문화는 90이예요.
공산품? 농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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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남원인 (2011-07-15)
정도시민님//
남원이 춘향이로 먹고 살려고 한다 는 가설에 대해서는 절대 부정은 하지 않겠지만
춘향을 통해서 요근래는 지리산을 통해서 전국적으로 남원이 알려진것은 부정할수 없을 것입니다.
남원을 산업도시가 아닌 문화관광도시라는 컨셉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 조차 부정을 할수는 없지요
다만 남원이 가지고 있는 유무형자산을 얼마만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남원의 발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겠지요.
물론 산업도시화하여 공장도 많이 서고 대기업도 들어와 재정자립도가 높아지면
좋겠지만, 지금의 현실로는 쉽지가 않을 것입니다.

남원시의 예산집행에 관한것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농축인에게 가는 예산과 춘향이에게 들어간 예산 비교도 한번 해보시고
단순하게 흑백논리로 비난 하시는 것 보다는 대안이 있는 비판이 보는 사람도
공감을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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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그래도 춘향이 (2011-07-15)
남원에서 춘향이 빼버리면 남는 것이 뭐 있겠소?
그리 삐딱하게만 생각하지 마시고 좋은 의견 내 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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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skadnjsdls (2011-07-15)
정말 옳으신 말씀이로소이다.
정신채려야합니다.
지금도늦지않습니다.
남원시행정관료나으리들 봉급만큼만이라도 뭔가를좀 해보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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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정도시민 (2011-07-15)
장수군에 왜장을 죽인 논개열사님이 있지만 논개로 먹고 살지 않는다.
사과와 한우로 먹고 살고 있다.

헌데 남원은 소설속에 춘향이로 먹고 살려고 하고 있다.
아주 멍청한 생각이 아니고 무엇인가!
춘향이에게 바친 시 예산이 지금까지 얼마인가를 보면 알것이다.
그 돈을 산업에 투자했더라면 지금 남원은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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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시민 (2011-07-17)
남원에 제갈공명과 8한신이 나온다고 하였는데
내가 보아하니 < 정도시민 >이냐 말로 제갈공명이 아닌가 싶소.
문화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지난번에는 경기도 김뭐시가
춘향이를 따먹다고 북한 관장에서나 볼수 있는 붉은현수막을
시내 곳곳에 부텨 놓아 순박하고 꿈을 먹은 어린이에게
저질스러운 순결을 대대적인 홍보를 하던만,
시민 여론에 밀려 선양회건물에 도배질을 하고 있는 짓들이,
남원시민의 이름으로, 선양회 이름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
자기집집마다 현수막을 걸어놓고 생각을 하게 하였으면 좋았으리마는...
요즘에는 조경남 장군의 역사스페셜에 의하연 춘향이가 실존이라고들
조잘조잘거리는데 < 정도시민 >님은 이성적으로 해학적으로 잘 풀어가고 있어
이런 지성인이 있어 <남원이 희망이 있다> 보겠다.
행동하지 않은 지성은 사망한 지성인과 다를 바 없고
깨달은 지성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런사회는
죽은 사회와 다름이 없는 것을 알고 있다.
< 정도시민 >님 제발 얄팍한 문화라는 이름으로
춘향이를 저속하게 하는 춘향이 기생단체 승냥이새끼들을 제압시켜 주십시오.

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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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정도시민 (2011-07-16)
유머러스가 좋죠.
그런 실제 춘향이를 갖고 만나면 싸우는 그런 단체가 있으니...ㅎ
남원시민들이 춘향이로 긍지를 느끼고 살고 있다...?
기분은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 춘향이 때문에 굶주리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나 하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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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자료로 보아 츤향전 작가는 남원 출신 산서 조경남 의병장설이 맞다.
단지 100% 조경남이 써 전해 온 곳이 아니라, 조경남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50% 지분) 하여 쓴것이 설화와 각종 민중 스토리가 가미되어 후세에 내려온 것이다. 국문학자 연세대 설성경 교수의 고증이 현실적으로 맞다.
글내용과 관련된 핵심 키워드 춘향이전설
이계석 2011-07-22
새전리 석불 입상은 관리를 하지 않아 풀과 아가씨 나무가 자라서 알수없시 풀속에 무쳐있다 남원시청 문화관광과 직원은 월굽만 바더가고 관리는 뒷전이니 이래서야 않되는데 한심하다 유형 문화재 제 120호 넘무햇구나 2008년 9월 4일 목요일날 에초기로 풀을 배었다 김영주 김춘만 이계석 등이 이곳에서 풀을배고 사진 찰영하여 집으로 귀가 햇다 이계석 2008-09-07
할미성터는 추춧돌만 남아있어 새월이 흐르고 아까시아 나무둥이 자라고 있으며 이곳 성터에는 이성계 장군시정 적장아기발토를 잡기 위해 매복 되었다가 다시 운봉 황산으로 넘어가서 적장 아기발토를 피바위에서 죽이고 조선왕조 500백년동안 왕을 햇던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몃년전에 산불로 인하여 산이 다 타버려 죽은 소나무만 남아 있다 이계석 2008-09-01
관왕묘 그대로 둘건인가 오만 잡초가 우거져 있으면 청소하는 사람도 없으니 남원시 관개자는 무얼하고 있는지 관리인하나 두지 못한고 있으니 한심하다 문화재가 뿌쎠져 있고 훅으로된 기와지붕에는 훅이나와있는대 그대로 보고만 있으려니 피가 꿀고 있는대 위그런지 몰라 ,,, 이계석 2008-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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