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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申采浩] | 역사의 인물 2007-07-25 14:42  | 조회수 1559
염우섭

단재 신채호 [申采浩,1880.12.8~1936.2.21] 

 

 

그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 언론인으로서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에서 활약하며 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앙양에 앞장서서 힘썼다. '역사라는 것은 아()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하고 한국 근대 사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무애생(無涯生)이며 호는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이며 1880년 12월 8일 충청남도 대덕군(大德郡) 산내면(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출생하였다. 1897년 신기선(申箕善)의 추천으로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그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논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주필로 활약하였으며, 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앙양에 힘썼다. 1907년 신민회(新民會)와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등에 가입·참가하고, 이듬해 순 한글 가정잡지를 편집·발행하였다. 주요수상 경력은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이 있고 주요저서로는조선상고사등이 있다.

 

또한 대한협회보(大韓協會報) 또는 기호흥학회보(畿湖興學會報) 등에 논설을 발표하고 1909년 일진회(一進會) 성토에 앞장섰다. 1910년 4월 신민회 동지들과 협의 후 중국 칭다오[靑島]로 망명, 그곳에서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 등과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권업신문(勸業新聞)에서 활동하다가, 1914년 이 신문이 강제 폐간되자 그 해 남북 만주와 백두산 등 한국 민족의 고대 활동무대를 답사하였다. 1915년 상하이[上海]로 가서 신한청년회(新韓靑年會) 조직에 참가하고, 박달학원(博達學院)의 설립 운영에도 힘썼다.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가, 의정원(議政院) 의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나, 한성임정(漢城臨政) 정통론과 이승만 배척운동을 내세워 공직을 사퇴하고 주간지 신대한(新大韓)을 창간하여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과 맞서기도 하였다. 그 후 비밀결사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단장, 신대한청년동맹(新大韓靑年同盟) 부단주(副團主) 등에 피선되었다. 1923년 민중의 폭력혁명으로 독립의 쟁취를 부르짖고 임시정부 창조파(創造派)의 주동역할을 하다가 다시 베이징[北京]으로 쫓겨가 다물단(多勿團)을 조직 지도했으며, 중국과 본국의 신문에 논설과 역사논문을 발표하였다.

 

1925년경부터 무정부주의를 신봉하기 시작, 1927년 신간회(新幹會) 발기인, 무정부주의 동방동맹(東方同盟)에 가입, 1928년 잡지 탈환을 발간하고 동지들과 합의하여 외국환을 입수, 자금 조달차 타이완으로 가던 중 지룽항[基隆港]에서 피체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旅順] 감옥에서 복역 중 1936년 옥사했다. 적과 타협없이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 이와 같은 견해가 곧 그의 역사연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고조선(古朝鮮)과 묘청(妙淸)의 난() 등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고 역사라는 것은 아()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 한국 근대사학(近代史學)의 기초를 확립했다.

 

저서에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 조선사론(朝鮮史論) 이탈리아 건국삼걸전(建國三傑傳)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 이순신전(李舜臣傳) 동국거걸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광복 60년]丹齋신채호선생 유족의 슬픈 광복절

[동아일보 2005-08-13 04:05] 

《“훈장을 받기보다는 시아버지의 호적에 아들의 이름을 올리는 것이 소원입니다. 언론인이자 역사학자로 국채보상운동을 이끌고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1880년 12월 8일1936년 2월 21일·사진) 선생의 며느리인 이덕남(李德南·61) 씨는 12일 떨리는 목소리로 기구한 사연을 털어놨다. 시아버지는 일제가 만든 호적에 이름 올리기를 거부하셨습니다. 평생 호적도, 국적도 없이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독립운동을 하셨죠. 시아버지가 광복 전에 돌아가시고 나니 독립운동가의 자식은 그야말로 뿌리조차 없는 사람이 됐습니다.”》

이 씨의 남편이자 단재의 장남인 신수범(申秀凡) 씨는 1921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태어나 이듬해 한국으로 왔다.

 

단재 선생의 부인 박자혜(朴慈惠) 여사는 아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수범 씨가 12세가 되던 1933년 수범 씨를 호적에 올리려 했다.

 

그러나 단재 선생은 일제가 1912년 새 호적법 조선민사령에 근거해 만든 호적에 이름을 올리는 것조차 수치로 여겨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수범 씨는 외할아버지의 호적에 올려져 미혼모의 자식처럼 살아야 했다. 수범 씨 호적의 아버지난은 당연히 공란으로 남겨졌다.

 

1967년 수범 씨와 결혼한 이 씨는 이후 40년 가까이 단재 선생과 남편, 아들에게 제대로 된 호적을 만들어 주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 씨는 담당 관청을 찾아가 단재 선생의 족보와 사진을 내밀고 상황을 설명했지만 오히려 누가 독립운동을 하라고 했느냐며 문전박대를 받기 일쑤였다고 회고했다. 참다못한 이 씨는 소송을 냈고, 1986년 서울가정법원은 수범 씨의 호적 개정을 허락했다. 비어 있던 수범 씨의 호적에는 신채호가 아버지로 기재됐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호적이 제대로 정리돼 있지 않다 보니 신채호는 수범 씨의 아버지일 뿐 이전 호주로서는 인정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기가 막힌 일도 겪었다.

 

1991년에 수범 씨가 사망하자 수범 씨의 자식이라며 한 남자가 이 씨를 찾아 왔다. 그가 가져 온 가짜 제적(除籍)등본에는 단재 선생이 전 호주로 돼 있었다.

 

꼬박 10년의 소송을 거쳐 그 남자가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밝혀 냈다. 이 과정에서 수범 씨의 무덤에서 뼛조각 2개를 빼내 유전자 검사를 거친 뒤 이 남자가 수범 씨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었다. 이 씨는 이 남자가 단재 선생이 남긴 충북 청원군의 땅 2000여 평을 노린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씨는 아들이 단재 선생의 손자임을 인정받기 위해 별도로 소송을 내 지난달에야 법원의 인정 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씨는 앞으로 단재 선생의 국적을 회복하는 데 힘쓸 계획이다. 광복 후 대한민국은 호적부를 기준으로 국적을 부여했는데 1936년 숨진 단재는 호적이 없어 국적조차 얻지 못했다.

 

이 씨는 지난해 5월 위암 판정을 받았다. 투병 중에도 그는 편히 쉴 수 없다. 지난해 9월에는 청원군에 있는 단재 선생의 묘를 예전 자리 바로 옆으로 임시 이장했다.

 묘가 계속 무너져 내리는데도 군청에서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충북도기념물(제90호)이라며 손도 못 대게 하더라고요. 자손들의 고통은 외면하고 그나마 남아 있는 선생의 흔적은 방치되고 있으니 광복 60주년이 무색할 뿐입니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2007년 2월 26일[월요일

*진주성회 염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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