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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 유산답사기 - 경복궁 [글쓴이 이동수] | (공모작)문화재수기 2006-10-10 20:49  | 조회수 3627
관리자

4 22일 토요일 아침 일찍 상쾌한 기분으로 청량리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 전날에 비가 와서 그런지 오늘은 햇살이 따스한 차창밖에 풍경이 더욱 근사해 보인다. 경춘가도를 끼고 가는 경춘선의 풍경은 많이 봐왔지만 오늘은 특히 기분이 좋다. 지루했던 중간고사를 끝내고 한달 만에 집으로 가는 길이라서 더욱 좋다. 춘천에서 자취를 하는 터라 집에서 반찬도 가지고 올 겸, 봄 옷도 챙기고 무엇보다 한국역사와 문화 과목인 레포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쓰러 올라간다. 교수님이 문화유산 답사하고 감상문을 써오라고 하실 때 약간 긴장이 되었다. 지금 것 태어나서 문화 유적지를 가본 것이 고등학교 수학 여행 때 불국사를 가본 것이 전부이다. 그 당시 친구들과 노는데 관심이 있었지 불국사는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코스에 불과 했고 지금은 친구들과 방에서 논 기억 뿐이다. 정말 문화생활과는 먼 삶을 살았다. 그래서 이번에 문화유산을 어디로 갈지 고민하던 중 나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바로 경복궁서울에 살면서 수없이 경복궁 앞을 지나갔지만 들어가보지는 않았다. 이번기회에 경복궁을 둘러 보기로 결정하였다. 집에 들려서 여정을 풀고 사진기, 필기노트, 그리고 간식거리를 챙겨서 3호선에 몸을 실었다. ‘경복궁역역시 유적지랑 연관된 역이다 보니 입구부터가 여느 지하철역사하고 달랐다. 과거와 현재의 중간쯤 서있는 착각이 일어났다. 나와 같이 걷는 사람들은 현대인들인데 석등과 돌로 구성된 벽 그리고 불사문이라는 석문(그 문을 지나면 장수을 한다길레 당연이 통과했다.)은 과거와의 연결 통로 였다. 긴 통로를 지나 햇살이 빛이는 곳에 당도하니 엄청난 규모의 외문인 광화문과 중문인 흥례문이 눈에 들어 왔다. 솔직히 광화문은 차를 타면서 많이 봐왔지만 그 안에 이렇게 넒은 궁궐이 있다는 것에 놀라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울에 살면서 이런 곳이 있었는지도 몰랐다는 것에 부끄러웠다.

 

잠시 외문인 광화문과 중문인 흥례문의 과거를 알아보자.

광화문(光化門) – 1395(태조 4)정문(四正門)으로 명명되었다가 1425(세종 7) 집현전에서 광화문이라고 바꾸었다. 석축기단(石築基壇) 3(三闕)의 홍예(虹朗)를 만들고 그 위에 정면 3칸의 중층우진각 지붕으로 된 목조문루를 세웠다. 두공(枓栱)은 다포식(多包式)으로 상하층이 모두 외이출목(外二出目내삼출목(內三出目), 외부는 제공(諸工) 뿌리를 쇠서로 하고, 내부는 운공(雲工)을 만들었으며, 첨차(墅遮) 양측면에는 모두 파련초각(波蓮草刻)을 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70 여 년간 중건되지 못하다가 1864(고종 1)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으로 다시 옛 모습을 되찾았다. 한일합방 후 1927년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북쪽에 이전시켰고, 그 후 6·25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1969 2월 현재의 철근큰크리트 구조로 복원시켰다.

◆흥례문(興禮門) - 1395(조선 태조 4)으로, 원래 이름은 '()를 널리 편다'는 뜻의 흥례문(弘禮門)이였다가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었고 1867(고종 4)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이 중건하면서 청() 건륭제(乾隆帝)의 이름인 홍력(弘歷)에서 홍()자를 피하기 위해 흥례문으로 고쳤다고 한다. 일제에 의해서 모두 파괴되었다가 1990년 정부가 경복궁 복원사업을 시작하면서 1996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 뒤, 2009년까지 마무리되는 경복궁 복원사업의 5개 권역 가운데 침전(寢殿동궁(東宮)에 이어 3번째로 2001년 10월 26 완공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우면서 철거된 지 85년 만이다. 광화문(光化門)과 근정문(勤政門) 사이에 있는 경복궁의 중문(中門)으로, 2층 목조건물이며, 정면 3, 측면 2칸이다주변 행각과 유화문(維和門기별청(奇別廳영제교(永濟橋어도(御道:임금이 드나들던 길금천(禁川:궁궐 안의 개천으로 御溝로 부른다) 등과 함께 복원되었다.

 

광화문과 흥례문을 처음 접했을 때의 기분은 놀라웠다. 어찌 어마어마한 규모의 성문을 기중기 하나 없던 시대에 사람들의 손으로 지어졌다는게 믿겨지지 않았다. 결코 뒤에 배경으로 서있는 고층빌딩과 견주어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과거 우리나라의 건축기술과 예술미에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사책에서도 배우듯이 흥선대원군때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많은 노동자들의 죽음과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하니 마음한편이 무거웠다. 유적지란 현재의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과거 우리의 조상이었던 분들의 피와 땀으로 일구어낸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긴 통로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잠시 피와 땀을 흘리시면서 우리의 훌륭한 문화유산을 남기신 조상분들에게 묵념을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수문장 교대의식

어디선가 힘찬 북소리와 함께 오와 열을 맞춘 씩씩한 군사들이 광화문과 흥례문 중간의 큰 광장으로 걸어 나왔다. 진행 아나운서의 마이크음이 나오면서 많은 관광객들은 신기한 눈으로 모여 들기 시작하였다. 내일부터 시작할 궁성문개폐 및 수문장 교대의식의 리허설을 하는 것 이였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수문장 제도가 확립된 때는 1469(예종 1)으로 그이전에는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궁궐을 지키는 일을 담당을했다. 지금 선보이는 수문장 교대의식은 수문장 제도가 정비되는 15세기 조선전기로 그 당시 궁궐을 지키던 군인들의 복식과 무기, 각종 의장물을 역사기록을 근거로 그대로 재현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수문장은 도성문과 경복궁등 국왕이 임어(생활)하는 궁궐의 문을 지키는 책임자로 엄격한 절차에 따라 궁성문을 여닫고 근무를 교대함으로써 왕실의 안녕을 물론 국가의 안위를 수호해 나간 중요한 지위였다. 조선시대 궁성문의 개폐는 도성문 보다 늦게 열고 일찍 닫았다고 한다. 도성문은 파루(오전 4시경)에 성문을 열고 인정(오후 10시경)에 닫은 반면에, 궁성문은 해가 뜰 때(平明, 보통 오전 5시경)에 열고 해가 질 때(初昏, 보통 오후 6시경)에 닫았다. ‘건고삼타란 아나운서의 멘트와 함께 힘찬 북소리가 3번 울리자 본격적인 교대 의식이 진행되었다. 여기저기 사진기의 셔터누르는 소리와 원더풀을 연발하는 외국 관광객을 볼 수 가 있었다. 수문장교대의식을 보면서 과거와 현재는 동일선상에 있다고 느꼈다. 왕실의 안위를 책임지는 중대한 임무이기에 엄격한 절차와 절도는 현재의 국가의 안위를 지키는 군인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다라는 말을 다시 한 번 느끼는 계기였다.

◆근정전(勤政殿)

본격적으로 티켓을 끈고 흥례문을 지나 근정문(勤政門)을 통해서 본 근정전은 웅장하고 위엄이 있는 모습으로 나를 맞이 하였다. 조선의 백성이 왕을 만나기 위해서는 3(광화문, 흥례문, 근정문)을 통과 해야만 한다. 조선의 왕이 백성을 만나기 위해서도 역시 이 3문을 통과 해야 한다. 3문은 조선의 왕과 백성을 하나로 이어주는 통로이자 조선왕조의 위엄과 권위를 드러내는 상징이었다. 3문을 통과하여 근정전 앞에 쓰니 필시 장원급제하여 왕을 대면하는 나의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근정전 앞의 품계석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니 여러가지 모양의 돌짐승이 있었다. 윗층에는 주작, 현무, 청룡, 백호상이 있고 아래층에는 방향에 맞게 십이지상이 있었다. 미리 조사한봐대로 개와 돼지는 없었다. 과거나 현재나 상서로운 공간에는 귀한 것으로만 장식을 하는 풍습은 여전한가 보다. 돌짐승을 쭈욱 돌아보고 나서 드디어 왕이 국가의 정사를 돌보았던 근정전 내부를 살펴 보았다. 건물 내부는 아래 위층의 구분을 없이하여 넓고 높았고, 다포양식(多包樣式)의 건물로, 현존하는 최대의 목조건물이다. 가운데는 왕이 앉였던 어좌가 있고 어좌 뒤에 일월오약병이 놓여져 있고 그 위로는 조각을 더욱 정교하게 한 나무로 된 된 지붕 모양의 닫집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금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근정전이지만 조선시대에의 백성들은 감히 볼 엄두도 못내었던 곳이였을 것이다. 미래의 우리 후손들도 아마 현대의 우리는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청와대를 지금의 근정전처럼 관광을 할 것이라 생각하니 단순히 여기를 문화유적지가 아닌 우리가 현재를 살아가는 생활을 보는거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묘한 기분을 뒤로 한 체 근정전 뒤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녕전(康寧殿)

임금이 정사를 살피던 복잡다단한 백성들의 생활을 깊이 생각하고 살펴 정치를 해야한다는 뜻에서 편전이라 불리던 사정전(여름), 천추전(, 가을), 만춘전(가을)을 지나 임금의 거처였던 강녕전으로 향하였다. 외부사람들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던 곳으로 연생전, 연길당, 경성전, 응지당등 여러채의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삼봉 정도전은 '오복 중의 하나가 강녕이며 임금이 강녕하면 그 혜택이 백성에 이른다 하여 강녕전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임금께서 머무시는 곳이므로 지붕위에 용마루가 없다. 세종때에 확대 개축한 이래 화재로 인해 세차례에 걸쳐 재건되었으나 1917년 창덕궁 침전이 소실되자 철거되어 그 목재 조달에 사용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95년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교태전(交泰殿)과 아미산(峨嵋山)

강녕전 뒤편에 위치한 교태전은 보통 다른 궁궐의 이름을 삼봉 정도전이 지은것에 비해 교태전은 아내를 배려한 세종(1440년 세종 22)이 건물을 짓기 전부터 붙인 이름이다. 세종은 전부터 건강이 안좋아서 세종 22년부터 세자에게 직무를 조금식 맡기다가 세종 24년부터 세자에게 직무를 맡겼다. 하지만 세종이 직접 처리할 직무는 사정전에서 강녕전으로 옮겨서 일처리를 하였기에 임금과 왕비의 거처인 강녕전은 말그대로 일보고를 하러 온 많은 신하들과 왕비의 가솔들까지 섞이게 되면 시끄러울 것이 분명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종은 교태전이라는 왕비전용집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세종대왕은 현대의 남성들도 배워야 할 남편상이다. 아내를 사랑해야하는 마음은 불변의 진리인가보다. 1920년 일본인들에 의해 철거되어졌다가 강녕전과 같이 1995년에 다시 지어졌다. 교태전을 돌아 뒤편으로 가면 아미산이라는 작은 인공 정원을 볼 수 있다. 이 정원은 경회루 증축 당시 인공연못을 넓히기 위해 파낸 흙을 옮겨다 만들었다고 한다. 이 정원으로 통하는 길은 경회루 쪽에서 오는 길하고 자경전쪽에서 조그마한 문을 통해서 오는 길이 있다. 난 자경전 쪽에서 문을 통과하는 것을 추천한다. 문을 넘어서자마자 펼쳐지는 화려한 돌담과 굴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이쁜 아미산굴뚝과 꽃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모습은 가히 표현을 못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 당시 내가 왕 이였다면 왕비하고 항상 이문을 통해서 정원을 구경하였을 것이다. 아름다운 아미산 정원을 살펴보고 감흥에 취해 있을 때 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왜냐면 아미산 정원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아름다운 자경전 꽃담길과 보물로도 지정되어 있는 십장생 굴뚝이 있기에 또 한번 문을 통해 자경전으로 발걸음을 제촉하였다.

 

◆자경전(慈慶殿)과 십장생(十長生)굴뚝

자경전은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다.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은 일직선의 축으로 세워져 있지만 자경전은 그 축에서 벋어난 교태전의 동쪽에 세워 졌다. 난 배치도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왕과 밀접한 생활공간은 일직선으로 놓아 왕의 출입을 편하게 하고 어머니의 생활공간은 교태전 동쪽 바로 옆에 지으므로서 어머니를 자주 뵈려는 마음에서 그러했던거 같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자미당 터에 고종의 어머니인 조대비(신정익왕후)를 위해 지었으나 불에 타버려 1888(고종 25)에 다시 지어 조선시대 정궁이라 할 수 있는 건물로 경복궁 안에 남아 있는 유일한 대비전이라고 한다. 복원된 여는 정궁은 천장이 아름다운 빛깔로 색칠되어 있지만 현존하는 자경전의 천장은 색깔이 많이 바래였던 것이 였다. 아름다운 주황색빛 꽃담(돌에 직접무늬를 넣은 것 이 아니라 퍼즐식으로 각각의 그림을 구워서 붙이는 식으로 만들었다)을 지나 뒤편으로 가면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하는 아들의 맘이 담긴 십장생 굴뚝을 볼 수가 있다. 처음 굴뚝을 보면 이것이 무엇에 쓰이는 물건인고 느낄 것 이다. 나도 그랬다. 앞에 표지판을 보기 전까지는 과연 굴뚝인지 조차 모르고 벽화인줄만 알았다. ·바위·거북 등 십장생은 장수, 포도는 자손의 번성, 박쥐는 부귀, 불가사리는 벽사를 상징하고 있다. 이 굴뚝은 조선시대 최고의 아름다운 굴뚝이라고 하니 과연 조선시대의 예술미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어머니나 아내의 생활공간을 아름답게 꾸미고 싶은 맘은 현재의 남자의 마음과 조선시대 왕의 마음이나 같음을 느끼면서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의 연장선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꼈다.

 

◆경회루(慶會樓)와 향원정(香遠亭)

경복궁안 인공호수 위에 세워진 경회루와 향원정은 근사한 멋의 향연이였다. 지친 두 다리를 쉬어 갈 수 있게끔 벤치를 호수 주위에 만들어 두어서 벤치에 앉아 쉬면서 향원정을 구경하였다. 연못에는 잉어가 노닐고 주위에는 화사한 꽃들과 나무 그리고 연못 가운데 섬에 세워진 향원정 그리고 향원정과 육지를 이어주는 취향교는 한폭의 풍경화 같았다. 잠시 넉을 잃고 바라 보았다. 지금의 취향교는 남쪽으로 있지만 만들어질 당시인 고종때는 민비가 살해되었던 북쪽의 건청궁(지금 복원공사 중이였다)하고 연결이 되었다고 한다. 향원정을 둘러 보고 마지막으로 잡은 유적지는 임금이 중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지었다는 경회루, 만원권 지폐 뒷면에도 있어 익숙한 이 곳를 보기로 하였다. 향원정에서 아미산정원을 통해서 가본 경회루는 입이 벌어질 정도로 큰 호수 위에 세워진 간결하면서도 호화스러운 큰 누각이였다. 처음 태조때는 작은 규모였으나 1412(태종 12)에 지금의 규모 경회루를 지었다고 한다. 임진왜란때 돌기둥을 제외한 모두 불타 버렸지만 1867(고종 4)때 복원하였다고 한다. 특히 호수에 비치는 경회루의 근사함에 혀를 내둘었다. 600년 전의 기술로 이러한 큰 누각과 호수를 만든다는 것에 놀라움이 앞섰다. 지금이야 포크레인으로 땅파고 기중기로 무거운거 들어 올려서 사람은 조립만 하면 되는데 옛 조상들은 직접 손으로 전부 일구어 내었다는 것을 느끼면서 우리 자손들에게 문화유산을 남겨 주실려고 피와 땀을 흘리신 분들의 노고를 생각하니 마냥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번 경복궁 답사를 위해 많은 조사도 하고 직접 가서 보고 느끼면서 우리나라의 왕실 문화를 간접적으로 남아 체험을 할 수 있어 좋았다. 우리나라도 영국처럼 왕이 존재하였다면 여기는 더 이상의 문화유적지가 아닌 왕의 생활 터전 이였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듯이 역사도 흐르고 있고 앞으로도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흘러 갈 것이다. 많은 과거 자료가 남아 있다면 현재의 우리는 그 당시의 역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시간이 흘러 가면 갈수록 자료는 변질되거나 퇴색되어 간다. 또한 우리의 후손들은 우리를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 그건 그 당시 사람들의 문화생활을 엿보면 간접적으로 남아 알 수 있다. 우리 왕실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필요한 많은 자료들이 외침과 오랜 식민지 생활로 자료의 분실과 손상이 많았다. 하지만 경복궁의 3문과 수문장 교대의식을 보면서 조선시대의 뛰어난 건축술과 웅장함 또한 왕실의 위엄과 권위 등을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 교태전의 아미산 정원, 자경전의 꽃담과 십장생 굴둑에서는 왕실의 여자들의 아름다움과 단아함 그리고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고 경회루와 향원정에서는 왕실의 휴식처인 호수와 누각을 보면서 조선시대도 현재의 우리처럼 휴식공간의 필요성이 간절했구나하고 느꼇다. 사람이 사는 곳은 예나 지금이나 미래나 변함이 없을 거라는 것을 이해하면서 지금 한창 추진중인 경복궁 복원사업이 무사히 끝마쳐 우리조상들의 어버이 였던 왕실의 문화를 우리의 후손들은 우리보다 더욱 이해하기 쉬웠으면 한다. 경복궁을 뒤로하면서 처음 왔던 경복궁역으로 들어 갔다. 아까 나올때의 긴통로의 느낌과 지금의 통로의 느낌은 사뭇 나를 놀라게 했다. 이 통로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하나의 타임머신이였던 것이였다.

글내용과 관련된 핵심 키워드 경복궁,   답사
댓글(3) l 관련글 인쇄하기 | 스크랩
김명숙 2008-06-18
문화해설사를 하고있습니다 너무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이승아 2010-01-14
문화 유적은 접하면 할 수 록 그 가치와 감동이 가슴으로 전해지는 거 같아요.

이유정 2010-07-13
감동 으로 읽고 감사의 인사 남김니다.
답사는 이렇게 해야 하는거란걸 깨닫고 배우고 갑니다.
역사속 옛왕실 문화에 대해 공부해볼 기회도 되였음도 감사 드림니다.
장문의 답사기 값진 체험을 위해 성심을 다하심이 느껴 집니다.
※ 한글 200자까지 입력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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